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함께 아테네에 있는 공공건물의 회랑을 거닐면서 대화와 토론으로 학문을 논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원래 그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건물을 세우지 않고 공회당같은 공공건물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후세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을 일컬어 산책하고 소요하면서 강론하는 페리파토스 학파, 즉, 소요학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철학자들이 한가롭게 산책하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토론하기도 하는 당시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 라파엘로의 유명한 작품 『아테네 학당』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요즘에는 강의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토론도 하고 강의도 하는 것이 전형적인 학교의 풍경이지만, 전통적으로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산책하면서 토론과 사색을 이어가는 것이 학문의 전당 본래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유서깊은 유럽의 대학 캠퍼스에는 대개 저명한 학자들이 산책하던 길이라는 전설적인 산책로가 한두 개씩은 있게 마련이다. 지금도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에는 멀리 넥카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에 철학자의 길이라 부르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
일본 교토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는데 아마 하이델베르크를 본뜬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교토대학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있어서 이 길을 즐겨 산책했다고 하니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무색하지는 않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도 유명한 산책로가 있는데 필자도 그 길을 걸어 본 적이 있다. 대학 캠퍼스에서 출발해서 작은 마을을 지나고 목장길을 지나 숲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면 오래된 카페를 만나게 되는데, 이 카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전설적인 지식인 그룹인 『사도들』의 회합 장소로도 유명하다. 20세기 초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쳐간 최고의 지성들이 이 그룹의 멤버들인데, 철학자 버틀란트 러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등이 대표적인 멤버였다. 이들은 이 산책로를 산책하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다가 카페에서 밤새 그 토론을 다시 이어갔다고 한다.
산책과 관련해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칸트는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지만 규칙적인 산책을 통해 건강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그의 많은 저작의 아이디어를 산책하면서 얻었다고 한다. 칸트는 매일 시계처럼 완벽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오후 세시반에는 어김없이 산책을 나가서 마을 사람들이 칸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걷기만큼 건강에 좋은 운동이 없다고 한다. 필자가 즐겨 찾는 양재천에는 늦은 시간까지도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그런데 걷기는 신체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매우 좋다고 한다. 가벼운 신체적인 움직임이 두뇌활동을 자극하고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여 두뇌를 활성화시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실제로 필자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책을 덮고 책상에서 일어나 한두 시간씩 걷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복잡하던 생각이 정리되고 상쾌한 마음으로 돌아올 때가 많다.
세상일이 복잡하고 힘이 들면 곧 하던 일을 멈추고 꽃과 나무와 자연을 벗삼아 자유로이 걷는 마음의 여유를 즐길 때 우리가 바로 철학자가 되고 소요학파가 되지 않을까 한다.
김완진 장로
• 서울대 명예교수
• 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