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할 때, 어떤 시각과 진영논리를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전혀 상반된 결과가 나온다. 특히 나라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들을 평가할 때, 보는 관점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평가되고 있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를 평가할 때, 전자는 공산당 숙청 과정에서 독재를 했고, 3‧15부정선거를 저질러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책임 때문에, 후자는 군사독재와 유신독재를 통해서 억압통치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나쁜 인물로 평가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역사를 볼 때, 종합적 전체적 맥락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조명해야 한다는 통시적 시각(通視的)의 역사관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면서 인촌 김성수 선생의 친일 행동이 드러났다면서 적폐청산을 한다는 명분으로 국무회의에서 56년 만에 그의 서훈을 박탈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이나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죄와 허물의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적폐청산을 당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부분(部分)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전체(全體) 업적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하여 사실적 공적(功績)을 훼손 내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종합적 전체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통시적(通視的) 역사관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근대 신학자 버틀러(J. Butler)는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이고, 그 이외의 것은 아니다(Everything is what it is, and not another thing)’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는 ‘역사는 있었던 그대로 보아야 한다(Wie es eigentrich gewesen ist?)’라고 하였다.
부분적 결점이나 허물을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는 분위기로 이끌어가려는 역사적 평가는 역사 왜곡의 소지가 크다. 공(功)은 공(功)으로 보고, 과(過)는 과(過)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종합적, 통시적(通視的)으로 보아야 할 역사관(歷史觀)을 무시하고 부분적 과(過)를 가지고 전체(全體)를 부정하려는 역사관은 분명히 편향적 역사관이다. 이런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관 때문에 적폐청산이란 구실로 전개되어 온 비극과 갈등의 역사가 많았다. 예컨대, 프랑스혁명(1789) 때, 중세 봉건적 잔재와 불평등한 절대주의 체제를 청산한다는 미명 하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에 반기를 든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 1794)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던 자코뱅파(Jaconins)의 주동자였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자신이 반대파를 처형했던 기요틴(guillotine)에 처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혁명 후반부에 가서 독일에서는 중세시대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과 독일민족의 개성과 민족성을 강조하는 질풍노도운동(Strum und Drang)을 비롯한 낭만주의운동(Romanticism)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비극과 갈등의 역사는 좌익사상을 추구하는 세계에서나 우익사상을 추구하는 세계에서나 오늘날까지 종식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되어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이념의 독선, 포퓰리즘(populism)의 분위기를 타고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학자나 정치가나 국민들도 자기 독선에 포로가 되면, 다른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독선과 배타적 경향 속에서 인류의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 여기에서 역사의 객관성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따라서 객관적 역사해석과 상식과 순리에 기초를 둔 가치관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는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려는 역사적 편향성에서 벗어나 통시적(通視的) 시각을 가지고 역사를 바르게 보려는 성숙한 역사관을 가지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