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에 나는 어느 기독교 재단 대학에 나가 매주 한 시간씩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기독교 개론>이었다. 어느 해 기말고사를 끝으로 한 학기가 끝났다. 나는 부지런히 학생들의 기말고사 답안지 채점을 마쳤다. 그리곤 학생들 성적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 학교가 정한 한 주간 사이에, 학생들은 자기들 성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곤 혹 점수에 이의가 있으면 교수에게 이의 신청을 한다. 그 주간에 한 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저는 아무개입니다. 제 점수가 93점으로 나왔는데. 왜 93점인가요? 많이 썼는데요.” 93점이면 Ao였다. 잘한 편이다. 그런데 이 학생은 조금 아쉬웠나 보다. 95점만 되면 A+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학생의 한 학기 성적을 모두 확인해 봤다. 기말고사 점수가 50점 만점에 45점이었다. 그런대로 잘 본 경우였다. 나는 이 학생의 답안지를 살펴보았다. 답안지 한 면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답안 내용이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는 못했다. 내가 강의한 내용은 거의 없고 일반적인 내용만을 적었다. 절반 이상, 개인의 의견을 썼다. 개인 의견을 진술해도 좋다. 반대 의견이든지, 찬성이든지, 아니면 제3의 의견이든지 좋다. 그래도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답안에 담아내야 한다. 교수가 중요하게 강의한 내용은 없고, 학생 개인의 의견만을 들으려고 시험을 치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학생은 아주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다.
나는 이 학생의 답안지를 확인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목회의 답안지는 몇 점일까? 나는 내 목회의 답안지에 어떤 답을 쓰고 있을까? 보통 많이 쓰면 점수가 좋을 것으로 안다. 내게 전화를 건 그 학생의 말처럼 말이다. “많이 썼는데요.” 목회도 일을 많이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것 같다.
그러나 내게 목회를 맡기신 그분이 내게 부탁한 일을 잘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은 나의 사명이다. 목사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있다. 나는 내 사명의 답안지에 어떤 답을 적어가고 있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올해도 벌써 5개월이 지나갔다. 올 한 해 나는 나의 목회의 답안지에는 어떤 답을 적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머지않은 날 목회를 마칠 때에 그분은 나의 목회의 답안지에 몇 점을 주실까를 생각해 본다.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분께서 내게 부탁하신 일을 그분의 뜻대로 잘 해낸 흔적을 나의 목회의 답안지에 담아내야 겠다. 나는 오늘도 내 목회의 답안지에 은혜의 점수를 기대하면서 ‘은혜 중에’를 외치며 목양의 길을 간다.
민경운 목사<성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