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2차 순회 전도 여행 (69)
구미에서 상주까지 (17)
언급해야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기에 계속 미루어 왔던 일을 오늘부터 몇 번 해야 할 것 같다. 1893년 상주시 낙동면에서 배위량이 순회 전도 일정을 생각하면 피해 갈 수 없을 것 같다. 부족하지만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1893년 4월 26일 아침에 선산 해평에서 출발한 배위량 순회전도 여행단은 그날 저녁에 상주 낙동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규가 옮긴 배위량의 일기에는 배위량이 선산을 방문한 것으로 나오고 숭실대에서 이상규의 번역을 참조하여 작성한 ‘제2차 순회전도 여행’ 지도에는 일시를 기록하지 않은 채 배위량이 움직인 노정을 낙동에서 선산으로 그리고 선산에서 상주로 간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이미 앞에서 필자는 이 문제를 앞에서 탁지일이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와 이상규가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를 대조하는 구조로 배치하여 독자들이 그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이번에 그것 전체를 다시 언급하지 않겠지만, 필요할 시는 다시 그것을 가져와 대조하면서 탐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선 아래의 질문에 초점을 두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배위량은 제2차 순회 전도여행에서 정말 선산(善山)을 방문했을까?
탁지일이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 중에서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밤, 낙동에서 쓴 일기에도, 27일 상주에서 쓴 일기에도 선산을 방문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구가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 중에서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저녁에 쓴 일기에는 배위량이 선산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선산 읍내를 지나 왼쪽 방향으로 갔고, 강을 건넜다.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김천(Kim San)은 이곳에서 80리나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성주 쪽으로 흐르는 강의 서쪽지역에 속한 곳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배위량이 선산을 방문한 사실을 기록한 날이 이상규가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에 따르면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저녁이다. 그런데 숭실대에서 작성하여 나온 ‘제2차 순회전도 여행’ 지도에는 전도 여행 노정이 ‘낙동->선산->상주’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이상규가 번역한 배위량의 일기를 참조하여 숭실대의 편집팀은 1893년 4월 27일 아침에 ‘낙동->선산->상주’로 이동한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필자는 ‘제2차 순회전도 여행’의 지도를 누가 작성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배위량의 일기를 이상규가 번역한 후 그 원고를 숭실대학교의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냈고 그 일기를 뒤에 편집을 담당했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편집팀에서 이상규가 번역한 일기를 참조하여 지도를 편집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런데 ‘제2차 순회전도 여행’ 지도에 두 가지 결점이 나타난다. 배위량은 4월 26일 낙동에서 쓴 일기에 선산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는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의 편집팀은 ‘낙동->선산->상주’로 이동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의 편집팀이 그린 그 지도는 26일 밤에 낙동에서 잠을 잔 후 4월 27일에 ‘낙동->선산->상주’로 이동한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도는 명백하게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을 오해한 것이고 순회 전도여행 지도를 잘못 그린 것이다.
배위량이 4월 26일 낙동에서 밤에 일기를 쓰면서 선산을 방문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만약 배위량이 정말 선산읍을 방문했다면 그는 4월 26일에 선산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선산 해평에서 선산을 거쳐 낙동으로 갔던지 아니면 해평에서 낙동에 도착한 후 주막에 짐을 맡겨 두고 선산을 다시 방문했을 것이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일정으로 4월 26일 노정을 걸었을 것이다.
1. 선산 해평->선산읍내->낙동
2.선산 해평->낙동->선산읍내->낙동
그러면 배위량은 어떤 노정으로 1893년 4월 26일에 여행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배위량의 일기와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찾아야 할 것이다.
이상규가 번역한 1893년 4월 26일 수요일 저녁에 낙동에서 쓴 배위량의 일기에 아래의 사실이 적시된다.
4월 26일, 수요일 저녁, 낙동
우리는 일찍 도착했다. 마부 중 한 사람의 병으로 오늘은 겨우 50리 밖에 여행하지 못했다.
해평에서 낙동까지 약 22Km이다. 22km이면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안 쉬고 걸으면 5시간 30분정도 걸리는 노정이다. 십리가 한 시간 정도를 걷는 길이므로 50리를 안 쉬고 도보로 여행했다면 5시간 정도를 걸은 것이다. 당시에 정확한 시계도 정확한 거리 측정 기계도 없었기에 배위량은 길을 안내하는 마부들의 주장에 따라 자신이 여행한 길을 50리로 기록을 남겼다. 이런 배위량의 기록으로 보면 4월 26일에 배위량은 아침 식사 후 일행과 함께 해평에서 낙동으로 이동했다. 만약 그들이 ‘1. 선산 해평->선산읍내->낙동’ 또는 ‘2. 선산 해평->낙동->선산읍내->낙동’의 노정으로 움직였다면 4월 26일, 수요일 저녁, 낙동에서 “우리는 일찍 도착했다. 마부 중 한 사람의 병으로 오늘은 겨우 50리 밖에 여행하지 못했다.”라고 배위량이 쓴 일기와 다른 양상이 분명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위량은 아래의 두 노정 중 한 개의 노정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위량은 “우리는 일찍 도착했다. 마부 중 한 사람의 병으로 오늘은 겨우 50리 밖에 여행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래 글은 배위량이 해평에서 낙동으로 가기 전에 선산을 둘로 보고 왔든지 아니면 낙동에 도착한 후 선산을 다녀왔을 경우의 수에 따라 그들이 그 경우에 걸은 대충의 거리는 아래와 같다.
1. 선산 해평->선산읍내->낙동 (약 90리의 길)
2.선산 해평->낙동->선산읍내->낙동 (약 160리의 길)
이러한 경우의 수를 살펴 보아도 배위량 순회 전도 여행단은 당시에 보통 여행자들이 영남대로 위로 걸어 걸었던 것처럼 배위량도 4월 26일 해평역에서 잠을 잔 후 27일에는 낙동역으로 바로 갔을 것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