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구정이 며칠 지난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내와 함께 친척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러 갔다. 나는 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난 다음 방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방구석에 놓인 탁자 위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산세베리아였다. 친척 어른이 산세베리아가 공기를 정화시켜 준다고 그곳에 두었나 보다. 하얀색 플라스틱 화분에 그리 크지 않은 산세베리아가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 화분이 좀 이상해 보였다. 산세베리아 줄기 하나가 화분 옆구리에 붙어있었다. 나는 화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산세베리아 줄기 하나가 화분 옆구리를 뚫고 나왔다. 화분 옆구리를 뚫고 나온 산세베리아 줄기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잘 자라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저 산세베리아 줄기는 그 질긴 플라스틱 옆구리를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어떻게 저렇게 자라게 되었을까?’ 나의 시선을 살핀 친척이 그 사연을 설명해 준다. “화분 옆구리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었는가 봐요. 어느 날 그 조그마한 구멍으로 산세베리아 줄기 하나가 나오지 않았겠어요. 그리고는 그 구멍에서 나온 줄기 하나가 죽지 않고 조금씩 자라더군요. 그래서 칼로 화분 옆구리 구멍을 조금 넓혀 주었지요. 그랬더니 그 줄기가 저렇게 잘 자라고 있어요. 참 희한한 일이지요. 아마 저런 화분은 우리 집밖에는 없을 겁니다.”
진짜 그런 화분은 보기 힘들다. 그때 나는 플라스틱 옆구리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나와서는 저리도 씩씩하게 잘 자라는 산세베리아를 보고 조그마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앞이 막힐 때가 있다. 길이 막힌다. 그럴 때에 답답해했다. 속상해했다. 때론 낙심도 했다. 그런 나에게 질긴 플라스틱 화분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비집고 나와서 저렇게 잘 자라는 산세베리아는 무슨 말을 할까? ‘왜 그렇게 일찍 포기합니까? 뭘 그렇게 낙심합니까? 남들처럼 화분 위로 뻗어 올라갈 수 없다고 좌절할 일이 무엇입니까? 화분 옆에 난 조그마한 구멍으로라도 자라면 되지 않겠습니까?’
혹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기이한 화분의 주인은 화분 옆구리를 뚫고 나온 줄기 때문에 그 화분을 좋아했다. 애지중지 다룬다.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대견해 할 수 없었다. 화분 가운데에서 자라는 줄기들보다 이제는 그 옆구리에서 자라는 줄기가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 무척이나 신경을 쓴단다.
남들처럼 크게 시작하지 못했으면 어떤가? 한 번 실패를 겪었다고 좌절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목회가 힘들다고 포기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목양의 길을 가면 되지 않겠는가? 힘을 내야 겠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겠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시며 나의 목양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이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민경운 목사
<성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