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보아스] 그리스도인으로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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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 가운데 ‘페르소나’라는 것이 있다. 원래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이 정신분석학자 융(Carl Jung)에 의해서 심리학적인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뜻은 “사회 안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본래의 자아의 모습과 다르게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참자아가 아닌 거짓자아의 모습이고, 그래서 참자아를 숨기고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굴에 쓴 가면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간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복음을 전하려 할 때 보이지 않게 또는 대놓고 박해를 받는 일도 많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고, 심할 경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조차도 숨기기까지 한다. 융의 말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자기 나름대로의 페르소나를 쓰고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의 페르소나를 쓰고 일터로 출근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일터사역을 해 온 방선기 목사는 일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자신의 삶이 신앙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할 때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염려해서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혹시 사장이나 상사가 불신자여서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줄까 두려워해서라는 것이다.
눅 12:8-9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시인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 것을 아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페르소나를 쓰고 살 사람이 있을 것을 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며 살라고 엄히 당부하셨다. 다시 말하면 일터에서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일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일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하나는 일터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전에 한 장로님을 만나서 인사를 나눈 일이 있다. 명함을 건네받았다. 명함에 ‘000회사 대표 000(000교회 장로)’라고 써 있었다. 특별히 장로 직함을 써 넣은 이유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기도하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하기로 결단했다는 것이다. 이 회사가 주님의 것이고 자신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업하면서 이 직함 때문에 불편한 일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없지는 않았지만 장점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접대를 하지 않아도 됐고, 편법과 탈법을 요구받지 않아서 좋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터에서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답게 일하는 것이다. 창 26장을 보면 이삭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 번은 이삭이 가뭄이 들어 블레셋 땅으로 갔다. 그곳에서 농사짓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부자가 됐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돌로 막고 행패를 부렸다. 이삭이 땅과 우물을 넘겨주고 그랄 골짜기로 옮겨왔다. 그곳에서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왔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이 그 우물이 자기들의 것이라 우겼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 즉 ‘다툼’이라고 부르고, 선선히 넘겨주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또 우물을 팠는데 역시 물이 나왔다. 그 지역사람들이 또 자기들의 것이라고 우겼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 즉 ‘대적함’이라고 부르고, 또 넘겨주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다시 우물을 팠다. 하나님의 은혜로 또 물이 나왔다. 다행히 그곳에서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불렀다. 이제 이삭은 르호봇에 머물며 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 르호봇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일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상징한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일터를 르호봇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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