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실존적 절망이 없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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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인식론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19세기의 키르케고르는 이 말을 뒤집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시작이다.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기초로 한다. 현재의 나, 나의 경험 속의 나, 나의 생존방식에서의 내가 본질이며, 이는 모든 인간이 각각 다르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각각 모두 다른 개체들인데 어떤 정해진 정의나 규범이나 이념으로 일률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정의와 개념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처한 현재의 나를 판단하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에 “나는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고, “인간은 선을 행해야 한다.” 대신에 “선이 무엇이고, 나는 지금 선을 행하고 있나?”를 묻고 답해보라는 것이다. 정해진 잣대로 나를 판단해서도 안 되지만, 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어디에 있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에 대한 답을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규범에서 찾지 말고, 스스로 묻고 답해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인간인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답을 찾으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을 수록 절망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윤리적 실존이다. 인간의 실존이 절망적 존재가 될 때, 세상의 모든 것이 절망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윤리적 실존은 자신의 절망을 인정하면서도 절대자에 대하여 반항하고 거부한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에 비하여 종교적 실존은 절망을 수용하고, 절대자 앞에서 연약한 자신을 깨닫고 떨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를 “모든 정해진 의식이나 사람들의 판단과 결별하고, 절망적 존재가 신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절망이 아니고서는 종교적 실존도 구원도 없으며, 인간은 여러 가지 절망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병’이다.
이 시대의 진짜 절망은 실존적 절망도, 구원도 없는 죽음에 이르는 환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강남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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