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리더] ‘트로트’ 전성시대의 문화현상을 읽다

Google+ LinkedIn Katalk +

요즘은 ‘트로트(trot)’가 대세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미스트로트>, <미스터 트로트>이 코로나 감염이 폭증하던 한복판에서 TV조선에서 방송되며 종합편성채널 10년 역사 이래 지상파를 포함한 전 채널 예능 프로그램 첫 방송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하며 대한민국 트로트 오디션의 신기록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트로트’는 명절이면 씨름대회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TV만 틀면 트로트가 나온다. 요즘 유행을 창조하는 대세는 레트로(retro)가 아닌 뉴 트로(new-tro)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 트로(new-tro)다. 트로트가 그렇다. ‘옛것’의 가치에 ‘요즘’것의 새로움을 더한 뉴트로는 잊혀졌던 옛것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사람들은 트로트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 시대 트로트가 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미스트로트에서 발견한 것은 생계형 행사장 가수의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노래가 생업이지만 오를 무대가 없어 생계가 어려워지고 살아갈 희망마저 포기했던 그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장터, 행사장을 뛰어다니는 트로트 가수들의 아픔을 진솔하게 많은 시청자에게 전달됐고 그들을 다시 보게 되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노래만이 아니라 인생이 그렇다. 마이크 하나 들고 전국을 떠돌며 노래 하나로 살아온 그들이 시청자들의 선택에 의해 영웅으로 등장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금수저’라는 신조어가 논란되었고, 우리 사회에는 ‘공정’과 ‘정의’가 깨어지고 노력한 것이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우울함을 던져 주었다. 부모의 힘과 재력으로 노력 없이 무임승차해서 누리는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며 평범한 젊은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할 때, 자신의 가진 재능 하나로 다시 재기하는 역전의 드라마는 보는 이들을 황홀케 했다. 감성의 시대다. 서로 경쟁하고 제압하고 자기편을 만들어야 살아남는 현실에 국민은 피곤하다. ‘트로트’는 코로나로 일상에서 피곤하고 지친 세대에 위로를 주었다. 노래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가 내 언 손을 잡아 주고, 시린 가슴을 덥혀 주고 퉁퉁 부은 발이 푹신한 털신 속으로 쏙 들어갈 때의 그런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다.

코로나의 불안 속에서 트로트의 열풍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마인드를 읽는 것은 중요하다. 문화현상, 문화 코드를 제대로 읽어야 사회가 발전한다. 보고 읽고 생각하고 글 쓰고 발표하고 몸부림치므로 세상을 읽는 혜안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트로트 전성시대를 방송을 보며 교회를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문뜩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교회도 은혜로운 찬양을 이 시대에 맞게 편곡해서 대중에게 다가가 보면 어떨까. 클래식한 곡만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국악찬양은 되고 힙합이나 랩으로 찬양하면 안 되는 걸까. 트로트 찬양, 뽕짝찬송은 커트라인에 걸리는 것인가. 성령 뽕필 트로트 찬양가수가 찬양 트로트를 들고 <미스트로트>에 과감하게 도전을 한 그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며 기독교TV 방송들도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설교방송만 할 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 개발의 대안은 없을까. 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굳어진 생각의 변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동안 편견적 시각에 갇혀 있던 ‘트로트’라는 그 벽을 깨며 향토성 짙은 트로트의 깊은 맛을 보게 해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냄새 풀풀 나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훈훈한 삶의 소통자세 때문 아닐까. 그래서인지 ‘트로트는 장년층의 레퍼토리’라는 가설은 이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어느 덧 세대를 넘어 청소년들까지 열광하며 국민가요로 등장한 것 아닐까.

이효상 목사 

•근대문화진흥원 원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