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6.25 전쟁영웅 故 백선엽 장군 1주기 특집” 백선엽 장군의 믿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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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독교 장례예식으로 보내 달라”
전쟁터에서 기독교인으로 살기로 서원

▲ 故 백선엽 장군 초상

▐ 6·25 전쟁영웅’ 故 백선엽 장군, 100세의 삶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모태신앙으로 백윤상, 방효열 사이에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2020년 7월 10일 오후 11시 4분경 100년의 삶에서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믿음의 어머니 방효열 여사의 신앙교육으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마펫 선교사와 함께 아펜젤러, 헐버트, 제임스 홀 선교사 등이 동역하여 세운 장대현교회와 평양신학교 등 교회와 기독교를 표방한 광성학교, 숭덕학교, 정진학교, 대학과정인 숭실대학교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뒤 군문에 들어와 6·25전쟁 때 1사단장과 이후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장관 등을 지냈다. 영락교회(김운성 목사 시무) 은퇴집사 백선엽 장군의 유족은 1944년 가을 평양에서 결혼한 부인 노인숙 씨와 아들 남혁, 남흥 씨와 딸 남희, 남순 씨가 있다. 기독교인 백선엽은 천주교인 노인숙에게 “당신이 천주교를 다녀도 좋고 앞으로 태어날 자녀도 천주교인이 되어도 좋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 때부터 3대째 기독교 집안의 기독교인으로서 개종할 수 없다”며 청혼하여 결혼을 했다.

▲다부동 격전지

▐ 두 가지 유언과 마지막 남긴 말씀

첫 번째 유언은 “6.25 전사자들이 많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전우들을 둘러보고 대전국립묘지로 가 달라” 였고 두 번째 유언은 “다부동전투 등 6.25 격전지를 비롯한 전쟁터 골짜기 8곳의 흙을 퍼와 허토를 뿌려달라”며, 직접 전투 지역의 지도를 그려주시기까지 하셨다. 마지막 남긴 말씀은 할머니 때부터 3대째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백선엽 장군은 전쟁터에서 기독교인으로 살기로 서원했고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면서 자녀들에게 “기독교 장례예식으로 보내 달라”고 하신 것을 볼 때 신앙적 영성이 크신 분임을 알 수 있었다.

▐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전 국토의 90%가 초토화되고 적군에게 넘어간 위기상황에서 백선엽 1사단장이 전선이 흩어져 사기가 떨어져 있는 전 장병들에게 하달한 메시지이다.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다부동전투에서 국군이 패했다면 대구와 부산까지 북한에 넘어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생명을 걸고 솔선하여 돌격 앞으로 하셨던 백선엽 장군과 피 흘려 나라를 구한 대가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호국영령과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6.25전쟁 71주년과 백선엽 장군 서거 1주기를 맞이하면서 2배가 넘는 적군을 물리친 장수 백선엽 장군과 신기에 가까운 병사들의 혼이 담긴 다부동전투를 기억하고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새로운 희망과 도전 정신을 갖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 한국군 최초 대장 진급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작전 등 결정적인 전투를 지휘,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계급장을 달아주면서 “옛날에는 임금만이 대장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화국이라서 신하도 대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백 장군은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1950년 여름, 1사단장으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다부동 전투라고 밝힌 바 있다. 두 달 가까이 부하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며, 전투 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았다고 증언했다. 전세가 역전돼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는 “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상황”이라며 행군을 강행해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해 태극기를 꽂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평양에 입성했을 때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던 것 같다. 평생 잊을 수 없었다”며 “1사단장으로 한미 장병 1만5천여 명을 지휘하며 고향(평남 강서)을 탈환했다”고 한다.

▐ ROTC제도를 도입

ROTC제도는 백선엽 장군이 한국군 초급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군사제도를 들여와 이승만 대통령과 의논하여 도입했다. 초급간부들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로는 부족하며, 또한 고등학교 졸업생을 간부 후보생으로 해도 부족했다. 백선엽 장군은 195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군사제도를 우리나라에 도입하여 1961년 6월 1일 전국 16개 종합대학 학군단이 창설되고 1963년에 제1기생 2642명이 처음 임관하게 되었다. 백선엽 장군은 한국군 창설의 주역뿐 아니라 ROTC 인재를 뽑아 대한민국의 든든한 국방력을 세워 놓았다.
백선엽 장군 서거 1주기를 맞은 2021년은 ROTC 창설 6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22만 ROTC들은 6·25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다.

▐ 육군 10개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전력증강

故 백선엽 장군은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의 방한 때 한국군 증강 필요성을 브리핑해 참모총장 재임 당시 육군 10개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확대한 일화도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군 내부 남로당 숙청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 장군은 1960년 대장으로 전역한 뒤 외교관과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으며 장관 재직 시절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일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탓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이름이 오르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 국방대학교 첫 명예군사학 박사

故 백선엽 장군은 국방대학교 사상 첫 명예군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8군사령부는 전쟁 당시 한국 방어에 있어 탁월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공로로 2013년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예전에 백 전 장군은 명예원수 추대가 시도된 바 있다. 그는 지난 2010년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명예원수(元帥·5성 장군)’로 추대하는 방안이 검토됐다가 불발됐다. 백 장군이 6·25전쟁 당시 겪은 일화 등은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육성 보관되어 있다. 태극무공훈장(2회),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캐나다 무공훈장 등을 비롯해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2010 밴 플리트 상’ 등을 받았다.

▐ 2021년 7월 10일 1주기 추모예배

2021년 7월 10일은 故 백선엽 장군 서거 1주년으로 오전 8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이 집사로 은퇴한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백선엽 장군 1주기 추모위원회 주최로 추모 예배가 드려진다. 추모위원회는 공동대표 민계식 회장(대한민국선진사회만들기 이사장), 송영근 회장(한국문화안보연구원 이사장), 한규성 회장(대한민국ROTC기독장교연합회 회장), 준비위원장 양성전 목사(국회조찬기도회 협력위원) 및 전국 관계 기관에서 참여한다.

▐ 백선엽 장군 비문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이 몸이 열번 백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조국을 위하여 내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이것은 나의 사명이며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전우들 곁에 잠들렵니다.

/ 구성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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