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아말리아’ 공주가 공식 업무를 수행하기 전까지는 21억여 원의 왕실수당 등 생활비를 받지 않겠다는 뉴스가 화제다. 네덜란드 예산법에 의하면 아말리아 공주는 오는 12월에는 18세에 이르면서 생활비 30만 유로와 수당 130만 유로 등 총 160만 유로(약21억 6197만원)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아말리아 공주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일 안해도 주는 그런 돈은 안 받겠다고 거절한 것이다. 네덜란드 뤼터 총리는 아말리아 공주의 고상한 조치에 감사하다고 하면서 아말리아 공주가 네덜란드의 훌륭한 여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당 M당과 정부는 거듭 코로나 피해 지원과 경기 회복을 위한 명분으로 33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또 편성했다. 그런데 이번 재난지원금은 소득 하위 80%가구를 대상으로 지급된다고 하는데 이 기준대로라면 연 소득 1억원이 넘는 4인 가구도 지원금을 받게 된다. 연 소득 1억원이면 부자인데!? 일 안하고 주고 받는 돈은 극히 예외로 함이 옳은데! 이런 지원은 졸부(猝富)들의 자식 키우는 모습들이라는 지적들이다. 오늘 우리사회 MZ 20~30대는 정부의 이런 선심이 아니라 할 일(직업)을 갈망하고 있다.
직업이 없어 수익(돈)이 없으면 빈곤과 자괴감 악심(惡心)과 질병까지 찾아든다. 이런 처지에 이른 사람들은 가슴을 치면서 산(山)에 들어가 도(道)를 닦기도 한다. 그래서 고대부터 돈의 본질에 대해 연구되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은 국가의 법과 윤리 때문에 존재한다고 결론 내렸고, 부국(富國)경제론자 애담 스미스는 돈을 수학 모델이 아닌, 관찰(돈의 기능)의 역사경제론을 폈다. 아리스토텔레스, 애담 스미스 등 인류의 스승들은 모두 돈의 성격과 돈의 기능을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 오늘날도 같다. 프랑스의 유명 사회주의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는 후진국은 기본 소득이, 노벨경제학 수상자 아브히지트는 선진국에서는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20여년 전에 「배반의 계절」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어려워진 바티칸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신부가 은밀히 마피아와 손을 잡고 암시장 활동으로 바티칸의 재정을 꾸려나가다가 보루가 터진다는 내용이었다. 암거래자가 배신하면서 신부로서의 비윤리적인 행위가 모두 발각되기에 이르렀고, 그 신부는 결국 추기경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자 그 신부는 “여러분이 입고 있는 그 고급 사제복 중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암시장 돈이지만 교회 활동을 위해 사용되었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하는 협박식 항변을 했다. 이 항변에 추기경은 당황해했다. 이 항변이 올바르고 고상한 심성(心性)을 추구하는 교회 신부로서 올바른 항변일까? 교회운영에 필요한 돈을 무법적으로 조달하여 펑펑 써도 되는 걸까? 이 영화는 일(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공짜 돈의 여파에 대한 무언(無言)의 어떤 답을 관중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묻노니! 오늘 한국 정치인들이 「돈의 윤리」(법적성격), 돈의 기능(교환기능등)을 잘 살피고 돈(정부재정) 집행을 하고 있는가?
대저 선진국은 정부·개인 모두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언젠가 어떤 미국의 소문난 부자가 구걸하는 거지에게 1달러를 주자 그 거지가 “부자가 겨우 1달러…”라고 하면서 주는 돈을 거부한다. 그러자 그 부자는 1달러를 지갑에 다시 넣으면서 “당신은 돈을 함부로 여기기 때문에 거지가 되었는가 보다”라고 중얼거렸다는 해외 토픽이 있었다. 서구 사람들은 우리 사회와는 달리 부자를 존경한다. 적어도 그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열심히 일하고 근검 절약의 인고(忍苦)로서 돈을 벌고 저축하고 신중하게 소비하면서 그들의 부(富)가 일구어진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도 개인과 똑같다.
돈에 관한 이런저런 사례를 살폈지만, 성경은 돈에 대해 다음 한 마디로 정리했다. “일 안한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 아말리아 공주는 이 성경 말씀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김동수 장로
<관세사·경영학 박사·울산대흥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