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청춘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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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조선일보 칼럼에서 1920년대 젊은 나이에 그 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을 인용했기에 원문을 다시 찾아보았다.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한 세기가 지났지만 청춘기에 대한 찬양이 한마디도 바꿀 것이 없다. 요즘은 「2030」이라는 신조어가 나와 대략 청춘 세대와 일치하는 의미로 쓰이는데 유난히 정치의 세계에서 이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잡고자 애쓴다.
우리 모두 청춘기를 지내왔지만 그 때를 회상하면 두 가지의 기억이 교차한다. 한편으로는 젊음의 열정이 끓어오르면서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을 시험했고 또 한편으로는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의 발로를 막는 현실장벽에 대해 저항했다. 보통 사람들은 두 방향 사이 어느 지점에서 타협하고 절충하며 인생의 다음 장으로 옮아갔으나 특별한 길을 택한 사람들은 매우 어려운 삶에서 무언가 값진 것을 남기기도 했다.

예수의 사역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고 보통의 인생 틀에 맞춰볼 수 없으나 그와 제자들의 행적은 분명 청춘의 열정의 소산이다. 복음서의 장면들에서 우리는 끓는 피가 고동치는 심장이 ‘거선의 엔진’과 같이 막대한 에너지를 분출하여 인류 구원의 대업을 성취했음을 본다. 예수 당시의 30세는 지금의 4-50세 정도의 사회적 비중을 인정받았을 터이니 그러한 위치에서 청춘의 동력이 성령의 인도로 모든 사역을 행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1세기 무렵 유대민족의 현실에 비하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복된 땅이다. 1920년대 일제 식민통치하의 조선시대에 젊은 이들이 처했던 암담한 상황을 오늘의 후예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2021년의 「MZ세대」, 「2030」들은 바로 직전 세대가 살던 시기의 여러 조건과 오늘을 비교하며 큰 좌절감을 갖고 또한 사회의 선배들도 이들의 호소에 공감하면서 문제의 해결에 진력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청춘의 고민은 무엇인가? 가장 절실한 것은 경제의 정체로 줄어드는 평생직장, 가정 형성을 방해하는 높은 집값, 거기에다 결혼의 당위성 상실에 따른 로맨티시즘의 실종 같은 ‘세상적’ 이슈들로 짐작된다. 이들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 사이의 항시적 문제에 부딪칠 때도 이러한 현실 상황의 고민을 벗어나기 어렵다. 정신활동이 가장 자유분방할 이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영원의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사색의 제목은 좀처럼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지 못한다.
교회 안팎에서 대하는 젊은이들의 내면이 부정적 요인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두렵다. 민태원 선생은 청춘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고 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35세로 신문사의 중책을 맡았다. 세상은 변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가슴 속 열정은 예나 이제나 다를 바 없다. 그 불은 남들이 불 붙이기 전에 안에서 타오르는 것이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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