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교회 김경진 담임목사가 인도하는 새벽기도회도 요즈음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찬송과 기도와 성경말씀 강해가 3-40분간 이어진다. 말씀은 성경책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신·구약을 교차하는데 최근에 고린도전서를 마쳤다. 13장 ‘사랑장’을 몇 날에 걸쳐 상고하면서 목사님과 성도들은 오늘 같은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동력인 사랑을 힘써 말하고 생각하고 머리 속에 품었다.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면, 사랑스러운 사람 즉 내 가족이나 예쁜 꽃, 내 나라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차지하지만 바울 사도의 사랑의 강령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미움이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 대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정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재생산하고 어려운 삶은 그 원인에 대한 원망을 쌓는다. “…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의 차원에서는 우리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인류의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의 언어마다 사랑에 해당하는 추상명사가 있겠는데 우리말의 「사랑」은 그 어원이 확실하지 않고 언제부터 쓰였는지 모르되 음감이 밝고 따뜻하며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한글(ㅿ아래아-랑)로 표기된 문헌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15세기 중엽 이후에야 나오고 그 이전에는 통상의 대화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을 말했는지 알 수 없다. 思量이라는 한자어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하는데 믿기지 않는다.
“어화둥둥 내사랑”을 노래하는 춘향전도 조선 중기 숙종조를 배경으로 하니 서민들 사이에 사랑이란 말이 흔히 사용된 듯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언어 관습에 비춰보면 옛사람들이 서양에서 love란 말처럼 밥 먹듯 쓰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랑을 ‘생각한다’는 말로 대체하여 은근히 애정을 담아내는 것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더 보편적이었다. 지금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본인 앞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우리의 본성에 사랑이 모자란 것은 아닐 텐데.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1년 반을 넘기며 사람들 생각의 상당 부분을 그에 대한 걱정이 차지하니 마음의 여유가 줄어들어 사랑의 감정도 메말라 가고 있지 않을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일찌감치 1, 2차 백신접종을 마쳐서 안도하면서 나라에 대한 감사를 품지만 공급 부족으로 젊은 세대가 확실한 면역을 보장받지 못하는데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다. 이를 국가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라 하겠으되 그러면서 상응하는 자기 희생에는 소극적인 부끄러움도 따른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사랑의 말씀이 더욱 귀하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사랑장」의 마디마디는 오늘 같은 난국에 꼭 맞는 인간관계의 금과옥조이다. 이러한 사랑은 대상의 범위를 정할 수 없는 최고 수준의 인간애이다. 여기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 사랑을 조선의 문인 이명한(1595∼1645)은 이렇게 그렸다.
“사랑이 어떻더니 둥글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짧더냐 발이더냐 자이더냐
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 간 데를 몰라라.”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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