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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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38)
만약 배위량의 <일기 2차본>의 언급이 맞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질문 1. 김서방은 김재수, 즉 김기원으로 알려져 있고, 김기원의 고향은 상주 낙동면 화산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왜 부산에서 상주로 귀향하면서 낙동으로 가지 않고 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으로 갔을까?
김기원의 고향(또는 거주지)이 상주시 낙동면 화산리(또는 신상리)라고 알려져 있는데, 김서방은 백원으로 귀향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기되는 다른 질문은 김서방이 김재수 즉 김기원이 아니다면 김서방의 고향이 백원이라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서방이 그 김재수, 즉 김기원이라면 그 김서방은 고향이 상주 낙동인 것이 자연스럽고 그가 부산을 방문하고 낙동으로 귀향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배위량의 <일기 1차본>은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배위량의 <일기 2차본>은 상주시 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으로 귀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기 1차본>
그는 부산을 떠난 후 7일 만에 집에 도착했고,
<일기 2차본>
그는 부산을 떠나서 7일 만에 백원(白元)에 도착했고,
<일기 1차본>에서는 부산에서 상주 집으로 귀향한 것으로 기록하고 <일기 2차본>에서는 백원(白元)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사소할지 모르지만 <일기 1차본>이 맞는 말을 하는지 혹은 <일기 2차본>이 맞는 말을 하는지에 대한 것을 말해야 할 과제를 주고 있다. 어떤 책을 저술하거나 편집을 한다면 저자나 편집자(혹은 첨가자 혹은 교정자)는 자기가 보는 글이 오류가 있다면 그것을 수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다 있다. 그런데 사본학 연구에서 지명이나 일시 등 중요한 내용을 수정하거나 빼거나 수정하는 일은 좀처럼 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본연구의 일반원리에서 보면 <일기 1차본>을 <일기 2차본>에 나오는 백원(白元)이란 고유명사를 빼고 집이란 일반 명사로 수정했다고 보기 보다는 집이란 일반명사를 더 세밀하게 표기하기 위하여 백원(白元)이란 고유명사를 첨가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에 <일기 1차본>을 <일기 2차본>이 수정했을 개연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일기 1차본>
그들은 약 12채 정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일기 2차본>
그는 […] 우리를 약 15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에 […].
위의 비교에서 보면 <일기 1차본>은 김서방이 약 12채 정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일기 2차본>은 그 마을이 약 15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에서 보면 <일기 1차본>은 김서방이 약 12채 정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배위량의 <일기 1차본>과 <일기 2차본>은 이러한 사소한 차이점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은 차이점이 편집하거나 수정할 때 의도적으로 수정할 수도 또는 실수로 범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책을 편집할 때 범할 수 있는 오류일 수도 있다. 그러나 100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김서방이 살았던 마을 호수가 12호인지 15호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우리는 김서방이 살았던 마을이 작은 마을이었다는 사실과 그 마을 안에 있는 이웃집으로 배위량 순회전도단을 안내하여 점심을 대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앉을만한 방을 가진 이웃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는 글에서 보면 김서방은 작은 오두막 집에 살았고 빈한한 형편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김서방은 우리에게 식사하고 가라고 간곡히 권했는데,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언급에서 보다시피 김서방은 손대접하기를 힘쓴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점심식사를 한 곳은 앉을 자리조차 없었던 김서방의 집이 아닌 배위량 일행을 데려갔던 그 이웃집일 것이다.
이제 배위량이 1893년 4월 27일(목요일)에 “낙동-상주-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상주” 또는 “낙동-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상주”의 경로로 상주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낙동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걷다가 영남대로변에서 가까운 김서방이 살았던 마을에 들러 점심을 먹고 상주로 향하여 갔는지에 대한 경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요즈음과 같은 시대에는 꼭 필요하다면 도보여행 중에라도 꼭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면 자신의 여행 경로를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고도 시외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불러 멀지 않는 그곳을 다녀온 뒤에 자신을 경로를 계속 따라갈 수 있을 것이지만, 1893년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낙동-상주-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상주” 또는 “낙동-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상주”의 경로를 따라 간 것이 아니라, 배위량은 낙동에서 상주까지 영남대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그리고 배위량의 1893년 4월 28일(금요일)에 상주에서 쓴 일기에는 “우리는 어젯밤 낙동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일기 1차본>)란 언급이 나온다. 그런데 <일기 2차본>에 나타나는 “우리는 지난 밤에 낙동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는 언급은 <일기 1차본>과 일치한다. 1893년 4월 27일(목요일)에 40리를 걸었다면 낙동에서 상주까지의 길이지 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에 들렀다 상주로 들르거나 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거리로 계산하면 40리는 낙동에서 상주까지 가면서 영남대로에서 가까운 김서방의 집이 있는 마을에 들렸다 상주로 갔다고 상정할 때 걸리는 거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필자의 생각은 1893년 4월 27일(목요일)에 배위량 일행이 백원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김서방이 김재수가 아니라면 김서방의 고향은 백원이고 김재수의 고향은 낙동으로 보면 문제가 간단하다. 그런데 김서방이 김재수라면 문제가 된다. 낙동이 고향이라면 부산에서 낙동으로 가지 않고 백원으로 갔다면 여러 가지 부딪히는 문제가 대두된다. 100년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난 요즘의 판단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 아래서 볼 때 <일기 2차본>에서 김재수가 부산을 떠나서 7일 만에 “백원(白元)에 도착했다”는 언급은 필사자가 덧붙인 말로 보는 것이 정황상 맞다고 판단된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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