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향기] 김상기 장로(덕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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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푸는 삶이 사명이자 하나님이 주신 선물”

– 교회를 자랑하고 목회자를 잘 섬겨야 –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장 25절)
자신의 이익이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삶을 실천하고 예수 십자가를 짊어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김상기 장로의 삶의 지침과 고백의 말씀이다.
“저의 삶이 풍족해서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아껴쓰며 후원을 하고 선교하는 것입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는 제 삶의 지침과 같은 말씀과 더불어 사회적인 모토는 ‘남을 돕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입니다. 나눔의 삶 실천은 돈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남을 돕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나눔의 삶을 몸소 실천한 김상기 장로는 30여 년간 후원한 초록우산의 1억원 이상 후원자들의 모임인 그린노블클럽 회원이다. 또한, 2018년 10월에 초록우산 고창지역 후원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아 오고 있다. 김 장로는 30년 동안 매월, 꾸준한 후원으로 어려운 아동을 돕는 일에 동참하며 현재까지 나눔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초록우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봉사단체입니다. 지금은 전국 후원회 회장을 탤런트 최불암 씨가 맡고 있고, 저는 고창지역 후원회 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나눔 실천의 연장선인 것 같습니다.”
김상기 장로는 대한민국의 미래 자산인 아동을 돌보는 것이 앞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강조하며, 정치인들이 투표권이 없는 아동들을 돌보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후원회 회장을 맡게 된 것도 아동들을 돌보기 위한 약속이라며,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이며,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임을 강조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아동들을 돌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선거권이 없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안타깝습니다. 저는 고창지역 후원회 회장을 맡겠다고 나선 것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미래 자산인 아동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 서기 위해 회장직을 맡게 된 것입니다. 누구 하나 강제로 하라고 한 적도 없고, 저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안해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약속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신념이기에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초록우산’ 그린노블클럽 가입

신앙의 배경은 할머니의 신앙

김상기 장로의 신앙의 배경은 할머니의 신앙의 유산 덕분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신앙을 이어 받아 7남매 모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7남매 중 장남인 김 장로는 어린 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여 삶의 현장에 일찍 뛰어 들었다. 또한, 김상기 장로는 군 복무 중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게 되어 가족들에 대한 책임이 막중해졌다고 했다.
“저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 덕천리 163번지가 출생지에요. 7남매 중에 장남이었어요. 위로 누나 2명이 있고, 아래는 남동생, 여동생들이 있죠. 그때 당시 아버지가 광주로 학교를 보냈어요, 장남이니까 상고에 가서 졸업하여 취직을 바로 해서 동생들 교육을 위해 뒷바라지 하라고 하는 뜻에서 가게 된 거에요. 그래서 대학 가는 것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게 됐죠. 이후 군 복무 중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막막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군대에 있고, 동생들은 어리다 보니 큰 아들이라는 책임감이 컸어요. 그래서 군복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휴가를 자주 나가기 위해서 백골 3사단 수색교육을 받았어요. 수색교육을 받으면 휴가를 더 자주 나갈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군복무 3년 동안(33개월) 어린 동생들과 가정을 돌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또한, 더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저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단단해진 것 같습니다. 군 제대 후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어요. 덕천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학교생활, 군 복무 기간을 빼고는 덕천교회만 섬기고 있어요. 광주에서 7년을 살면서도 덕천교회를 섬겼죠. 2000년 2월 24일에 장로임직을 받으며, 사랑으로 지키며 섬기고 있어요. 시골교회이지만, 단단한 교회입니다.”

진심에서 시작되는 섬김

김상기 장로는 군 제대 후 택시 회사를 다니다 그 회사를 인수한 고창 운수회사에서 근무를 하다 보험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군 제대 후에 택시 회사를 다녔는데 그 회사가 고창 운수회사로 인수 합병이 된거에요. 그 이후 제가 회사의 총괄 전무가 되어서 모든 일을 도맡아 했죠. 동양화재를 맡은 후배가 어렵사리 보험을 하고 있어서 제가 조금씩 일을 봐주면서 고창운수회사 사무실 한켠에 책상을 주어서 업무를 보라고 했어요. 근데 후배가 부도를 내버리는 바람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었어요. 이 일들을 제가 해결하면서 92년 7월부터 보험을 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보험이랑 전무 일을 겸업을 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이후부터 보험 설계를 하면서 실적들이 늘기 시작했죠. 운수회사 사장님께 죄송하기도 해서 사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보험 일에 뛰어 들게 된 거죠. 특히, 99년 7월에 오리엔탈 그랑프리 연도대상시상식에서 마티즈 차량을 시상으로 받아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혁 목사에게 증정했어요. 이어 부임하신 김성식 목사님의 15년 된 차가 고장으로 멈추게 되어 ‘젠트라’라는 새차를 제가 자비량으로 선물하기도 했어요. 이어 최기원 목사님을 청빙하여 위임식을 하면서 ‘프라이드’를 제공했어요. 당시에 교회 형편이 어려운 관계로 교회 재정과 제가 협력하여 차를 구입했어요. 그리고 제가 대학교는 안나왔지만, 대학생들 학비도 도와주고, 어려운 목사님들 교회를 개척할 때 헌금을 하기도 했죠.”
김상기 장로는 현재 메리츠화재 고창대리점 대표와 더불어 고창 우리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일을 알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김 장로는 교회를 자랑하며 목회자를 잘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의 삶으로 인해 물질의 복을 받았고, 현재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 오리엔탈 시상식에서 마티즈차량 시상 받은 후

교회 봉사는 삶의 기쁨

덕천교회가 모교회라고 말한 김상기 장로는 초등학교 2학년때 교회 마룻바닥을 걸레를 빨아 닦고, 청소를 하며 교회 어른들한테 칭찬을 받게 된 계기로 인해 재미로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 현재까지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고, 봉사가 삶의 기쁨이라고 고백했다. 어렸을 때부터 봉사의 길이 본인의 사명이라고 다짐하며 살아온 김상기 장로는 군대를 제대하고 교회에서 총각 집사로 세움을 받았다. 이후 교회 건축 때 쌀 50가마 헌금을 계기로 교인들이 십시일반 모아 교회 건축을 완공했다.
“장성제일교회 이성수 원로목사님이 당시에 우리 교회 전도사님으로 계셨는데, 군대 갔다온 저를 총각 집사를 시킨 거에요. 이후 교회를 섬기며, 이성수 원로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시작하셨어요. 교회를 세울 때 시골이라 돈이 없었어요. 교인들이 직접 모래와 자갈을 이고, 나르며 건축을 어렵게 했어요. 제 기억으로는 당시가 79년도일꺼에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 건축을 보면서 쌀 50가마를 건축헌금으로 약정했어요. 그 당시에 갓 제대한 제가 돈이 어딨겠어요. 돈이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그렇게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50가마를 헌금한다고 하니깐 어머니는 당연히 반대하셨지만, 할머니가 당시에 살아계셨다면 잘했다고 칭찬해주셨을 거에요. 제가 드린 건축헌금을 계기로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모아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어요. 이때가 20대 중반일거예요.”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세워진 교회를 소개하며 영혼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라고 자랑했다. 김 장로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디를 가든 교회를 자랑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덕천 마을이 좀 컸어요. 당시만 해도 200여 가정이 모여사는 큰 마을이었요. 55년도에는 하나만 있던 교회가 합동측 교회 하나, 제가 지금 섬기는 통합측 덕천교회로 분리가 된거죠. 저희 교회 주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덕천리 119번지’에요. ‘119’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디를 가든 덕천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고 생명을 살리는 교회라고 자랑을 하고 다니고 있죠.”

▲ 케냐 정부로부터 기부받은 4만평

선교의 열정 남달라

언제 어디서든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자랑하고 사랑하고 있는 김상기 장로는 선교의 열정도 남들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본인이 선행을 베풀고 봉사한 구체적인 일들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한 일을 굳이 나서서 말하고 다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제가 베푼 선행이요?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요. 베풀고 나면 다 잊어버려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그렇게 살아요. 굳이 하나를 떠올리자면, 2002년 당시에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혁 목사님과 동기인 케냐 선교를 하고 계셨던 김동희 여자선교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저희 교회로 선교 보고 할 겸 방문한 적이 있어요. 저보고 그래요. ‘장로님 케냐에 교회 하나 세워 주시면 안되요?’라고 말이죠. 그래서 얼마가 드냐고 물었죠. 1천 5백만원 정도 든다고 하기에 건축비를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2002년도에 케냐에 천오백만원을 보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건축비가 부족해서 1천 5백만원을 더 보냈어요. 건축비가 바탕이 되어 케냐 정부가 4만평을 기부를 해주었죠. 기부 조건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 보건소, 고아원, 우물파는 사업이 목적이었던 거죠. 그래서 ‘사마리아 미션’으로 정부가 등기를 해주었어요. 하지만, 제일 먼저 70여평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이어 건물을 짓고 우물을 팠어요. 아시다시피 아프리카 특성상 물이 없어서 힘든데 그곳에서만 물이 펑펑 나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물을 받으러 오는 거에요. ‘예수를 안 믿으면 물을 안준다’고 하니까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는 거에요. 물로 인해 사람들이 몰렸어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거죠. 교회가 암보셀리 국립공원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데, 교회 건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관광객들도 몰리고, 일반책에도 소개되기도 했어요. 2003년 7월 1일에 ‘케냐 덕천교회’를 세우고 헌당을 했고, 이후 초등학교와 보건소, 고아원, 우물을 팠고, 2013년도에 광주에 있는 새희망교회를 섬기고 있는 장로님으로터 후원을 받아 고등학교(새희망고등학교)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3천만원을 헌금한 씨앗이 뿌리가 되어 기초가 된거죠.”
김 장로는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월 30만원 씩 선교 헌금을 하고 있다고 한다. 2003년 당시에 선교사가 5년만 도와 달라고 한 것을 5년만 도와줄 수 없어서 20년째 매월 선교비를 헌금하고 있다.
“매달 30만원을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안 쓰고 하면 그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선교비라고 생각했어요. 케냐 말고도 이천 장로회를 통해 필리핀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어요. 이천 장로회는 전서노회에서 2000년도에 장로 임직 받은 모임입니다. 또한, 연변 조선족 대성교회 리모델링을 한다고 하여 선교비를 보내, 교회 의자, 강대상 구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매월 10만원씩 선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 케냐 덕천교회와 초등학교수업 광경

화목을 위한 노력 기울여

김상기 장로는 화목과 연합을 위해 분쟁이 있는 교회를 화해 하기 위한 씨앗을 심어 최근에서야 그 뿌리가 내려 아름다운 결과를 냈다. 또한, 농촌교회의 특성상, 어려운 교회들을 위해 대형교회들과 가교 역할을 했으며, 동반성장위원회에서 미자립교회들을 위해 구좌를 만들어 지속해오고 있다. 특히, 전서노회 노회장을 지내면서 목회자와 장로 간의 화합을 위한 노력을 했다.
“노회장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노회를 위해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특별한 활동을 해서 미자립교회들을 도왔던 것은 아닙니다. 총회 활동을 두루 하다보니 명성교회, 전서노회와 자매 노회인 영등포노회, 소망교회, 서울교회 등 목회자들과 선배 장로님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노회에 속한 교회들이 농촌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미자립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노회장 시절 일일이 노회 내의 목사님들께 전화를 돌리며, 한 구좌(10만원) 이상씩 해달라고 요청을 했고, 그렇게 해서 한 구좌, 한 구좌씩 늘려 지금은 많이 늘어났습니다. 어려운 코로나 팬데믹 상황 가운데서도 교회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미자립교회를 후원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후원해 주시는 교회와 목사님들, 장로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노회장으로 섬기면서 첫 번째 목표는 화합과 연합이었습니다. 노회 내의 A교회가 교회를 짓고 나서 목사님과 장로님간의 갈등이 생기며 재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방관하기도 해서 문제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디게 하는 것을 보고 교회를 살려야 하는 마음이 컸고, 불철주야 해결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서로를 설득해 나가며 최근에서야 마무리가 되어 새로 오신 목사님께서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를 부흥 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노회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서로의 오해가 있으면, 목사님들을 설득하고, 장로님들을 설득해 가며 오해를 풀어 주며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이런 모습들로 인해 장로 회원들이 앞장서서 단일화를 위해 노력을 해 주셨습니다. 장로노회장을 할 수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양보를 하며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제가 노회장에 단독 출마할 수 있게 되어 노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는 총회를 섬기기 위한 부총회장의 길도 열리게 된 것 같습니다.”

부총회장 후보로 추대 받아

이를 바탕으로 김상기 장로는 앞으로 총회를 위해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고 싶다고 밝혔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총회 부총회장으로서 섬겨 보고 싶다고 했다. 이에 앞서 전서노회 장로회는 지난 11월 정기총회시에 김상기 장로를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대한 바 있다.
“저는 앞서 말했듯이 늘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온 삶밖에 없습니다. 버는 돈을 조금 아껴서 저보다 더 어려움 사람을 도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총회 활동, 노회 활동, 전국장로회연합회 활동들도 봉사라고 생각하며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저의 좌우명인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8절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하나님의 것만을 생각하며 찾으며 저를 쓰고자 하시는 곳에서 봉사하며 나눔의 실천을 이어가는 삶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박충인 기자

▲김상기 장로가 운영하고 있는 장례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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