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술집에서 일하는 김 양은 EWC에 공부하러 왔던 한 한국 유학생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상대는 총각인 조 선생이었다. 총각이고 대학 강사였던 그는 한물간 김 양과 러브스토리가 성사될 리가 없었다. 조 선생의 일시적인 외로움은 누구나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동거까지는 안된다고 동료들이 다 말렸는데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 선생은 기간이 차서 돌아갔다. 떠날 때 어떤 약속을 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김 양은 조 선생이 결혼하기 위해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본토 여행을 떠나기 전, 김 양의 전화 연락을 받고 술집 「아리랑」에 갔다. 김 양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푸짐한 안주와 술로 나를 접대하였다. 얼마 만에 그녀는 예쁘게 싼 작은 선물 상자를 내놓았다. 수고스럽지만 귀국하면 조 선생에게 좀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기 정성을 담은 시계라고 말하였다. 그녀가 왜 나를 선택해서 이런 부탁을 하게 되었는지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잘 전해 줄 거지요?” 하고 씽긋 웃으며 아양을 떨 뿐이었다. “나는 조 선생과 결혼할 꿈을 버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요. 하찮은 것이 어떻게 그런 야무진 꿈을 가질 수 있겠어요?” 그녀는 그가 떠나면서 자기에게 굳게 약속한 것을 아직도 믿고 있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았다. “아마 부모가 반대하겠지요. 그래서 조 선생님도 괴롭겠지요. 나는 다 이해해요. 그분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외로워서 내 품으로 왔지요. 그래서 나도 한때 화려한 꿈도 꾸었고요. 정말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꿈을 꾸면 안 되는 건데. 그러나 그 사람 만난 뒤부터 나 정말 새 사람으로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만일 내 품으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그가 나더러 오라면 오고, 가라며 가고 죽으라면 죽을 거예요. 지금도 그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그가 그녀를 버릴 것은 분명했다. 동거할 때도 많은 학생이 그를 만류했고, 그가 떠날 때도 그깟 술집 계집애 잊어버리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김양을 보고 있으면서 그를 포기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예수 믿고 새사람이나 되었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한순간 스쳐 지나갔는데 부담스러운 생각이었다.
“아직도 소식이 없지요?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릴 생각입니까?”
“안 기다려요. 다 포기했어요.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끝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시계를 보내고 끝을 내려고 그래요.”
“욕이나 하고 말지. 왜 시계를 보냅니까?”
“좋은 감정으로 끝내고 싶어서 그래요. 새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내 생애의 마지막 순정인데….”
나는 그녀가 잠언에서 말하는 것처럼 귀한 생명을 사냥하는 음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전쟁과 가난과 무지에 짓밟혀 사냥할 만한 힘도 없는 여인이었다.
나는 선물 상자를 들고, 나오며 꼭 전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미국에 오니 모든 것이 혼란해졌다. 영어학을 배우러 온 어떤 선생은 한국에서는 영문법이 너무 질서정연했는데 이곳에 오니 변형생성 문법 어쩌고 해서 문법이 무엇인지 혼란해져서 돌아갈 때는 문법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 간다고 말했는데 내 경우가 그런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분명한 것 같았는데 이곳에 오니 기독교가 무엇인지 참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 아리송해져 버린 것 같았다.
만일 내가 해외 유학을 마무리하는 선물을 가지고 간다면 어떤 것이 될까 생각했다. 결국, 포장은 아름답겠지만 그 속은 윤리관의 혼돈, 종교관의 혼돈, 판단력의 부재, 열등 콤플렉스, 좌절… 등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선장군처럼 맞아 줄 아내 앞에 패잔병처럼 돌아간다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