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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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도착하자 영등포에서 탄환을 실은 화물 기차가 후방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영등포역으로 갔더니 피난민들이 개미떼같이 몰려 있었다. 

피난민들은 탄환을 실은 화물 기차에 위로 올라갔다. 우리 가족도 올라가서 겨우 좁은 자리를 잡았으나 여덟 식구가 앉을 수가 없었다. 눈이 내리고 있어 어머님과 우리 6남매는 이불을 펴고 그 속에 서로 맞대고 겨우 끼어 앉았으나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눈을 맞으며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계시다가 기차가 멈추면 일어나셔서 눈을 털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그 시절 기차는 석탄으로 가는 기차였다. 똬리굴을 지날 때 굴속이 언덕이라서 탄환과 피난민을 실은 기차가 힘이 부족해서 올라가지 못해 뒤로 한참 갔다가 속력을 내서 달려 언덕을 오르려고 해도 오르지를 못하고 다시 뒤로 갔다가 속력을 내서 달리기를 계속 반복을 하다가 동이 틀 무렵 겨우 굴을 빠져나왔다. 굴을 빠져나오면서 어느 여인이 소리를 치는데 ‘우리 아이가 없어요’ 하며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오고 추워서 어린아이를 이불로 덮고 이불을 끌어안고 밤새도록 졸며 자며 하는 사이에 언제 아이가 이불 속에서 빠져나갔는지를 몰랐던 것이었다. 

화물 기차는 가는 시간보다 서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느 역인지 기차가 멈추자 갑자기 누군가 ‘불이야’ 하는 소리를 치자 다들 도망하려고 뛰어내리기도 하고 옆으로 내려오기도 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먼저 아이를 업고 재빨리 내려가셔서 우리를 잡아주려고 서서 계시다가 위에서 던지는 쌀가마에 다리를 맞아 다치셨다.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거짓말로 ‘불이야’ 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어 기찻길 근처 오두막집이 있어 찾아갔더니 주인 내외가 우리를 보고 추운데 들어오라고 하며 반겨주었다.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는데 아이들이 옷이 없어 아랫도리는 벗고 있었고, 장판도 없는 흙방에서 살고 있었으나 행복해 보였다. 어머니께서 다친 것을 보고 나을 때까지 있으라고 하면서 정성을 다해 주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잡곡과 감자뿐이었으나 양식을 아끼지 않고 대접해 주었다. 천사와도 같은 분들이었다. 세월이 지나 그분들의 사랑이 고마워 찾으려 해도 찾을 길이 없다. 

어머니께서 어느 정도 치료를 받으신 후, 다시 피난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나무막대를 짚고 겨우 걸으시면서도 동생을 업고 온종일 걸으셨다. 빈집이 있어 쉬려고 들어갔더니 늙은 호박이 있어 얼마나 반갑던지 그 호박으로 죽을 끓여서 온 식구가 배불리 먹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던 어느 날! 쌀은 피난민에게 주는 안남미가 좀 있으나 건건이가 없어 된장이라도 얻으려고 길가에 있는 집에 들어가 어머니께서 ‘된장 좀 얻으러 왔습니다.’ 하자 주인아주머니가 나오더니 울타리에서 호박잎 한 장 따서 그 위에 된장 한 수저를 얹어 주는 것을 어머니께서 받자마자 놀라시며 던져 버리시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된장에 가시(된장에 생긴 구더기)가 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사람 먹으라고 주었는지 싶다가도, 사실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우리 모습이 너무 속상하고 서글펐었다. 

그렇게 힘들게 걸어서 경상북도 성주에 도착해서 거기서 피난살이를 했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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