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서재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대학 시절 필자가 편집인으로 활동했던 학생회 잡지 몇 권을 발견하고는 당시를 회상하며 상념에 잠겼던 적이 있다. 그 잡지에는 1970년대 초 대학생으로서 경험했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이 고스란히 글로 남아 있었는데, 특별히 눈길을 끈 것은 당시 절친했던 친구가 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칼럼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당시에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하고, 비비안 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칼럼의 저자는 당시 많이 회자되던 이 제목을 빌려서 암울한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려 했던 것 같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이 지식인과 민중을 탄압하고 있었고, 극심한 가난과 저임금 노동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암울하고 희망이 없었던 그때 당시, 젊고 패기가 넘쳤던 대학생이면 누구나 암울한 현실에 비분강개하며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고, 개인적 욕망을 좇아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그런 인물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그 칼럼에는 그런 순수한 대학 초년생의 마음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극히 소수만이 소위 운동권에 남아 노동운동이나 반독재의 저항을 이어갔을 뿐, 대부분의 친구들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하는 소시민적인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데 대한 약간의 미안함이나 부채의식을 갖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반면에 이상만을 좇아서 운동권의 길을 택한 친구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려웠고, 학업조차 계속할 수 없어 사회적으로 불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중 일부는 민주화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좌절과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인생의 격동기를 지나고 되돌아볼 때 과연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이었고, 어떤 삶이 좋은 삶이었을까? 이 질문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이란 욕망과 이상 사이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균형을 찾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 블랑쉬는 미국 남부의 몰락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냉혹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환상 속에 살며 추악한 성적 욕망 앞에서 번번히 굴복하고 마는 가련한 운명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온갖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끝에 갈 곳이 없어 “욕망”이라 이름한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천국”이라는 역에 내려 뉴올리언즈의 동생 집으로 가게 된다.
동물적 본성으로 가득한 현실주의자인 동생의 남편 스탠리와 끝없는 갈등을 겪고, 드디어는 미치라는 남자와의 결혼계획이 스탠리의 개입으로 좌절되면서 결국 그녀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데서 작품은 막을 내린다.
욕망과 꿈 사이에서 헤매는 주인공 블랑쉬의 이 말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난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나는 진실을 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 하는 것을 말해요.”
욕망과 꿈이 너무나 괴리되어 있을 때 우리는 공상가가 되거나 속물이 되거나 아니면 주인공과 같이 정신병에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 현실적인 욕망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