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리더] 시인 윤동주의 삶이 주는 7가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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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은 시인 윤동주 서거 77주년이다. 모두들 왜 그렇게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윤동주 시인인가?”라고 말이다.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반도의 주변 인물이기에 우리가 무관심해왔던 탓인지 중국이 자기네 시인이라고 도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사실 자유 대한민국의 보배이자, 자랑이다. 가슴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하겠다. 시인 윤동주의 삶을 주목하면 배우게 되는 7가지 인생교훈이 있다.

첫째, 시인 윤동주에겐 삶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있다. 송몽규와 문익환이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일본 유학까지 같이 간 강처중도 있었다. 마지막 옥중에까지 송몽규와 함께 저항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둘 다 같은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평생을 같이하며 죽음까지 함께하는 이런 친구를 가졌는가. 둘째, 시인 윤동주에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그의 삶의 여정은 배움의 길이었다. 배움을 위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해외까지 가서 생활한 것이다. 셋째, 시인 윤동주에겐 남다른 한글사랑이 있다. 시인 윤동주의 한글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문우(文友)」에 발표한 작품인데, 그리고 이는 최소한 1941년 6월 「문우(文友)」는 5호를 마지막으로 한글사용 금지라는 시대의 압박으로 종간되는데, 그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며 작품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사실과 문학을 사랑했던 그들이었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 되었던 사실과, 식민지 공간 속에서 총력전의 군국주의 체제 강화로 인해 교우회 발행의 「문우」는 해산되는 마지막호 전체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일문(日文)으로 쓰여져 있을 정도였지만, 윤동주와 송몽규, 강처중 세 친구의 시만은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 있다. 넷째, 시인 윤동주에겐 좋은 멘토가 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으로 기독교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한 곳 북간도에서 김약연 목사님을 비롯하여 아리랑의 춘사 나윤규, 조두남, 윤극영, 이동휘 등 그에겐 좋은 멘토였다. 다섯째, 시인 윤동주에겐 불의에 도전하는 저항정신이 있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가 침묵하며 불의에 동조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겐 도전을 준다. 여섯째, 시인 윤동주에겐 자기희생을 감당하는 자기성찰이 있다. ‘참회’와 ‘십자가 정신’이다. 시대의 아픔을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기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하고, 잘못한 것에 대한 진실한 참회는 맑은 양심의 기초가 되었다. 일곱째, 시인 윤동주에겐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시(詩)로 다시 부활한 ‘시 세계’가 있다. 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으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뇌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맑은 영혼과 깨끗한 시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옥중에서 무명한 자로 남긴, 그의 정신세계의 표현이자 삶의 고백서인 두 권의 자필 시집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첫 시집이 나온 이후 잠시 죽은 것 같았던 그 죽음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았고 다시 시(詩)로 부활하여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살아나며, 전 세계인이 기억하는 한류시인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 그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시인 윤동주는 우리들에게 참 아름다운 시어를 남겼다. 육신은 비록 처참하게 산화되었지만 어려웠던 시대를 별빛처럼 빛낸 시인을 다시 기억하고 짧은 삶이지만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 시대의 아픔을 안고 밤하늘에 별빛같은 삶을 산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다시 추모하게 된다.

이효상 목사 (다산문화예술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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