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교포 목회 (2)
북미지방 샌프란시스코(상항) 지방회는 1918년 1월 31일 오후 8시30분에 상항지방회관에서 역사적인 ‘상항국어학교’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개교식은 하상옥 지방회장 사회로 개회되었으며 김영훈 목사의 기도와 학무원 백일규 씨의 취지 설명 그리고 홍언, 임정구, 황사선 씨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는 샌프란시스코 2202 파인 스트리트 최정익 씨 사택을 교실로 사용하면서 부근 어린이 45명을 모집하여 교사 백일규, 강앨리스 지도하에 한글을 교육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17년 7월 2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북미(北美)지방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18년 1월에 이르러 ‘샌프란시스코 한인 소년서회’를 넘겨받아 서회(書會)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소년서회’는 원래 ‘주 원’ 씨의 소유물이었으나 1월 19일에 귀국하게 되면서 김영훈 목사는 소년서회의 상호와 소유 서적을 모두 넘겨받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1242 Mason ST에 위치한 ‘소년서회’에서 판매하던 일부 서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헌법요의, 외교통의, 간명교육학, 말의 소리, 웅변법, 말의 소담, 산술신서, 국가사상학, 대한역사, 초등식물학, 고동산학신편, 춘향전, 주역, 대학, 논어, 맹자, 중용, 해당화, 공산명원, 산약소본, 찬송가”
1917년 10월부터 흥사단 단원이었던 김영훈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한인 소년서회’를 1918년 11월까지 운영하다가 서적 사업 전부를 흥사단 본부로 매각(賣却) 처리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소년서회’를 운영하면서 ‘신한민보’에 ‘서적광고’를 하였으며 맨티카 예배당 건국헌금(3원)과 국민의무금(5원)을 납부하기도 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18년 10월 10일 오후 3시에 샌프란시스코 피취스저랠 예배당에서 개최된 ‘북 캘리포니아주 한인 남미이미교회 지방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한일 남미이미교회 지방연회’는 남미이미교회 감독 뚜부스 씨의 사회와 리대위 목사의 기도로 개회되었다.
당일 한인 교회 대표자는 7명으로 샌프란시스코의 리대위 목사와 황사선, 김정은, 최진하, 김영훈 그리고 새크라멘토의 임정구, 김홍균 씨가 참석하였다.
당일 ‘한인 남미이미교회 지방연회’에서는 직원선거로 전도사 임정구, 황사선, 량주은, 최능익 4명을 임명하였고 리인신, 김홍균 씨는 새크라멘토의 전도사로, 김영훈, 최진하 씨는 샌프란시스코의 전도사로, 한치홍 씨는 맨티카의 전도사로 새로 선정하였다.
특히 새크라멘토 지방에는 전도사 1인을 두기로 하였고 2개월 후에 합격한 인원을 택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총회 파송 중화민국 산동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간 후에는 1918년 10월부터 ‘한인 남미이미교회 지방연회’에 소속되었다.
1918년에 김영훈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1242 Mason ST에 위치한 ‘소년서회’를 운영하였고 ‘북 캘리포니아주 한인 남미이미교회 지방연회’에 소속되기에 이른다.
또한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샌프란시스코(상항) 지방회에 소속되어 있었던바 1918년 11월 16일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 지방 통상회의에서는 대의원으로 투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영훈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한인 소년서회’를 1918년 11월까지 운영하다가 서적 사업 전부를 흥사단 본부로 매각 처리하고 새크라멘토(Sacramento)로 이거하게 되면서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대의원 직책은 1918년 12월 15일에 열린 특별회의 결정으로 백일규 씨가 맡게 되었다.
새크라멘토로 이거한 김영훈 목사는 1919년 2월 1일, 한인 예배당에서 거행된 새크라멘토 대한인 국민회 기념경축 행사에 참가하게 된다.
기념경축식은 새크라멘토 지방회 회장 리옥형 씨 사회로 개회되었으며 애국가와 개회취지 설명 그리고 기도와 국민회가, 축사(김찬일)에 이어 새크라멘토 지방회 역사(김홍균) 그리고 김영훈 목사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기념경축식 마지막 순서 창가(唱歌)는 김요한 학생이 “내 나라 위하여”라는 노래를 불렀으며 참석자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다.
1919년 3월 1일, 조국에서는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 퍼지게 되고 일본 침략자들의 잔인한 악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과거 일본의 악행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해야만 한다.
유사 이래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본 참략자들은 한반도를 강압적으로 점령하고 무단통치하면서 한인의 독립의지를 말살하려 하였으나 미국과 중국 상해, 북만주 지방 등지에서의 독립활동은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1919년 4월 4일 오후 8시에 개최된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 제15차 의사회에서는 새 정부 조직에 대하여 축전을 보내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고 4월 16일에 열린 제16차 의사회에서는 대한공화국 건설과 신정부 조직에 대하여 4월 15일을 경축회 일(日)로 정(定)하고 독립단 원조를 위하여 중화민국인(中華民國人)에게 의연(義捐)을 청(請)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청연위원(請捐委員)으로 홍 언, 김영훈, 임정구, 강영각 4인을 선정하였다.
새크라멘토에 거주하는 김영훈 목사는 1919년 4월 15일 오후 7시30분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주최 경축회에 참석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지방회는 대한공화국의 건설과 새 정부 조직에 대하여 경축하기 위하여 경축회를 개최하였다. 경축회는 100여 명이 모여 애국가를 부르며 개회되었고 김영훈 목사께서 기도하였다.
이어서 리건영 회장의 취지 설명과 이살음 씨의 축하연설이 있었다.
경축회의 순서 가운데 독립선언서 낭독과 신정부 조직의 발표, 그리고 독립축하가(獨立祝賀歌) 순서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으며 “대한공화국 만세-새 정부 만세-우리 민족 만세”를 목소리 높여 외치며 폐회하게 된다.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의 중화인 교섭위원 김영훈 목사는 우리 민족의 대활동과 중국 및 동양의 관계를 들어 장건하고도 간명하게 중국문장으로 작성하여 샌프란시스코 지방 중국신문 ‘중서일보’ 4월 30일자 신문 제1면에 발표하였다.
중앙총회(中央總會) 중화인(中華人) 교섭위원 김영훈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지방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6월 7일에 샌프란시스코 지방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6월 7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났으며 새크라멘토 지방에 거주하는 중국인 교섭 임무와 함께 7월부터는 남감리교회 새크라멘토 한인(韓人)교회 관리목사로 피임되어 시무하게 되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