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목사가 의주읍 서교회 목회활동을 시작할 즈음에 중국 산동에서는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이대영 목사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21년 9월, 미국에 거주하던 김영훈 목사는 중국 산동으로 다시 보내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새롭게 중화민국 선교사로 새로 선택되어 1922년 6월에 파송된 선교사는 이대영 목사였다.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은 시찰원 리자익, 변린서 목사와 마로덕 선교사를 산동 선교지에 보내어 시찰케 하였으며 중화기독교(中華基督敎) 산동과 교동노회에 참석케 하여 양국 기독교의 협력을 굳게 하였다.
방효원 선교사 역시 1922년 5월에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중국 장로회 조직 총회와 중국 전국 기독교대회에 참석하여 조선장로회의 중국선교를 널리 알리었다.
1922년 봄에 귀국한 김영훈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 서교회 임시 목사로 시무하다가 1923년 1월 28일 서교회에서 거행된 목사위임 투표에서 위임목사로 선임되기에 이른다.
1922년 봄에 귀국하여 평안북도 의주 서교회 임시 목사로 시무하던 김영훈 목사는 1923년 1월 28일에 거행된 목사위임 투표에서 위임목사로 선임되었다.
의주 서교회는 위임목사로 선임된 김영훈 목사에게 월봉 60원을 드리기로 하였으며 의산노회에 담임목사 시무 허락을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2월, 서교회에서 개최된 제9회 의산노회는 의주 서교회의 담임목사 청원과 서교회 장로 시무투표에서 피선된 강필태, 장유관, 김태주, 박봉근 장로 시무를 허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김영훈 목사의 위임예식은 1923년 3월 1일 오후 2시에 거행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1년 전인 1922년 3월 1일 오후 1시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옥스트릿 한인교당에서 거행된 독립선언 기념경축행사에서 축사를 낭독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민족독립 의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삼일절이라도 고국에서는 독립과 애국 또는 애국가라는 말조차 언급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김영훈 목사는 미국에서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소속으로 마음껏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이제는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 사는 일개 종교인으로 침묵해야 했다.
마음속으로나마 기독교 활동을 통한 민족개조와 계몽 활동, 영혼구령을 다짐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923년 3월 1일 오후 2시, 서교회에서 거행된 김영훈 목사 위임예식은 의산노회 차원에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위임예식은 찬송 순서에 이어 류여대 목사의 기도와 림준철 목사의 성경봉독이 있었고 리준화 씨의 설교가 있었다.
문답 순서에서는 노회장 위대모(魏大模) 선교사가 김영훈 목사에게 문답하였고 부회장이 교인들에게 문답하였다.
그리고 권유 순서에서는 남행리 선교사가 김영훈 목사에게, 김석항 목사가 교인들에게 권유하였고 찬송을 부른 후 노회장 위대모 선교사 축도로 폐회하였다.
제9회 의산노회(노회장 위대모, 서기 홍하순)는 김영훈 목사의 위임예식을 마치고 의주 서교회에서 회무를 계속 진행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노회 결정으로 교회사기(敎會史記) 편집인 김석항, 김영훈, 안승원, 류여대, 홍하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의산노회 소속 의주 서교회는 의주 지방에서 영향력 있는 교회로 뿌리 내리고 있었으며 의주 지방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는 의주(義州) 양실학원(養實學院)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실학원 남녀 고등과와 보통과 졸업식은 1923년 3월 15일에 서교회에서 四五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장창식 원장 사회로 거행된 졸업식에서 고등과 남자 4명, 여자 8명, 보통과 남자 29명, 여자 11명 합하여 52명이 졸업하였으며 내빈 가운데 하와이에서 온 황사열 목사가 참석하고 있었으며 그의 간절한 축사가 있었다.
의주 서교회 담임자로 시무하게 된 김영훈 목사는 양실학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1925년도 학교상황조사표(學校狀況調査表)에 의하면 양실학교에는 교원 8명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보통과 학생 270명, 고등과 학생 20명이 배우고 있었다.
의주 양실학교는 이미 보통과 306명, 고등과 92명을 배출한 의주지방의 명문 기독교 사립학교였다.
1925년에 김영훈 목사는 양실학교 교장의 임무도 맡고 있었으며 유여대(劉如大) 목사와 교목의 일도 겸임하고 있었다.
의주 양실학교는 1년 수입과 지출액이 각각 5,000원에 이르는 비교적 큰 기독교 사립학교로 대구의 계성과 신명학교,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덕성학교, 경성의 정신여학교, 전남 목포의 정명여학교, 순천의 매산학교, 함북 성진 보신학교, 평양의 숭덕 그리고 숭현여학교 등과 어깨를 겨루는 기독교계 명문사학이었다.
김영훈 목사는 의주 서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양실학교 교육 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즉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종교활동과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 사업에 참여하였다.
중국 산동 선교사와 미국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의 중요 임원을 역임하였던 김영훈 목사는 의주 서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의주 양실학교 교육 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게 된다.
장로회 총회가 1923년 9월 9일 보고 받은 ‘학교상황조사표’에 의하면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에 위치한 양실학교는 교장 김영훈 목사 이하 교원 11명이 시무하고 있었으며 보통과 학생 327명, 고등과 학생 82명이 배우고 있었다.
중국과 미국에서 활동하여 널리 알려진 풍채(風采) 좋은 김영훈 목사는 의주지방에 거주하는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1923년 3월 13일에 거행된 신의주 제일교회 한석진 목사 위임식 사회를 맡게 된다.
한석진 목사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만 2년 동안 임시목사로 시무하다가 교인 다수의 청원에 의하여 의산노회 허락을 받아 위임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한석진 목사 역시 신의주 제일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신의주부에 위치한 신명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신명학교는 교원 3명이 시무하였고 보통과 학생 100명, 고등과 학생 10명이 배우고 있었다.
김영훈 목사는 의주 서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의주 양실학교 교육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의산노회에서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제10회 의산노회는 1923년 8월 27일부터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 예배당에서 서양선교사 2명(위대모, 남행리), 목사 15명, 장로 49명 도합 66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되었다.
중국 안동현은 김영훈 목사가 1913년 가을, 중국 선교사로 가던 길에 일박하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