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교습생들도 더 많아지고 여유도 생겨서 피아노 한 대를 더 마련해서 하루에 30명까지도 가르쳤다. 어릴 때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소원이었고, 풍금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풍금 소리가 피아노 소리보다 더 좋다고 느꼈는데, 해먼드오르간을 1년을 배우면서 그 소리에 매혹되어 언젠가는 꼭 집에 마련해 놓고 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미8군 교회에서 세계 OCU 대회가 열렸던 때였다. 그 교회에 해먼드오르간이 있었는데 예배에 반주자가 없다고 육사 OCU 회장 오형제 교수님께서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나는 대답은 했으나 영어로 진행되는 예배이고 오르간도 낯설어 당황도 되고 떨리기도 해서 오르간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린 후 반주를 시작했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실수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 은혜였다. 때를 따라 필요할 때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사실 나는 해먼드오르간이 너무 갖고 싶어 매달 조금씩 저축을 했었다. 어렵게 모아가던 저축이었는데 남편의 수필집 ‘거목으로 큰집을’ 출판비로 사용되어 결국 나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해먼드오르간! 나이가 90을 바라보면서 꿈은 옛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심정을 아는 자녀들이 디지털 피아노를 마련해 주고, 응접실과 나의 서재에 음악 감상할 수 있는 오디오 시스템을 음향도 좋고 큰 스피커의 울림도 좋은 것으로 놓아 주었다.
큰 아파트의 거처도 마련해 주어서 방이 4개다 보니 장로님 서재, 나의 서재를 꾸미고 지낸다. 물론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자녀의 도움도 받아 나의 생애에 가장 큰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살았어도 내가 원했던 위의 모든 것들이 없어 아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서재에는 성경 필사하는데 주로 사용하는 책상과 컴퓨터용 책상까지 너무도 분에 넘치는 효도를 받는다.
예전에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있었다면!! 하지만 노년의 삶! 누리고 살아감이 자녀들에게 고맙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에게 소중한 첫 교습을 시작할 수 있었던 풍금, 그리고 서울 할머니가 그립다.
학도병(6사단 민사처)
여학생 – 원주:2명, 춘여고:1명
남학생 – 서울:1명(대학생), 원주:고등학생 몇 명
북진했던 과정
춘여고 1학년 시절 시작된 6.25에서 북진하는 국군의 취사를 돕는 학생으로 지원하여 화천에 도착한 후 약속된 일주일 취사 돕는 일을 마쳤으나, 군에서 학생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은 군을 돕기로 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각 부대로 배치되었다. 나는 6사단 민사처로(남학생 2명, 여학생 3명) 배치됐다. 우리는 화천~원산~평양~개천~희천까지 갔었다. 남학생들에겐 총을 주었고, 여학생들에게는 총을 주지 않았다. 진격하는 곳마다 민간인들 안심을 시키면서 대한민국을 알려야 했고, 주민들과 함께 아군들의 취사도 도와야 했다.
우리 학도병들은 옷이 없어 인민군이 버리고 간 군복 만들던 천이 있어 현지에 있는 민간인들에게 부탁해서 아군 군복과 비슷하게 만들어 입었고, 후방에서 보급품이 미처 오지를 못해 생활필수품은 물론 먹을 것도 없어 민가를 찾아 빈집에 들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먹어야만 했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