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22) 우남 이승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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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 동문 등을 조기에 배워

영어 배우려고 기독교 학교로 가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에서 세종대왕의 형 양녕 대군(大君)의 16대 후손으로 아버지 이경선과 김해 김씨의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5대조 이후로는 벼슬길이 끊겨서 왕족이면서도 가난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이경선(李敬善)은 풍류객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한 후 아름다운 경치와 풍수를 쫓아 몇 달씩 전국을 방랑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해서 재산을 탕진했던 인물이었다. 어머니 김 씨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당시의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글자를 익혔고 학식도 있었다. 자식들을 잃고 나서 마흔이 넘어서 낳은 6대 독자 이승만을 끔찍하게 아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살림을 이어가며 아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세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해 우수현(雲水峴) 남쪽에서 살았다. 호(號) 우남(雩南)은 바로 이런 의미다. 아버지는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색(思想)에 심취했고 그에게 영향을 준 어머니는 불교신자였다.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다섯 살에 천자문(千字文), 열 살에 동문(東門) 선습(先習)과 통감을 배웠고, 열세 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폐지한 후 서당에 가지 않았다. 

1894년 신긍우의 권유로 신교육을 결심하고 상투를 잘랐다. 1895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신학문과 기독교를 접했으나 신앙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에게 가장 기이했던 것은 19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승만은 “우리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는 이상한 사람들이 이와 같이 어리석은 신조를 믿는가?”하고 물어보았다. 내가 기독교 학교에 간 것은 영어를 배우려는 욕심이었다. 나는 예배당에서 아침예배도 드렸는데, 내가 설교를 들을 때에 예수가 단지 구원만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는 또한 동포애와 희생의 제사를 가르쳐 주는 위대한 교사였다. 그리고 예수를 공자와 같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승만은 공부하면서 제중원(濟衆院)에서 일하는 화이팅(Georgiana E. Whiting)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웠다. 그는 1년도 안 되어 일취월장하여 초급 영어반 교사가 됐다. 이 무렵 미국에서 서재필(Philip Jaisohn)이 귀국했다. 이승만은 그에게서 1년 이상 세계 지리, 역사, 정치학을 배웠다. 서재필은 민중 계몽과 몰락하는 나라를 일으키고자 협성회와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이승만은 이 단체의 간부로 활약했다. <협성회 회보>가 창간될 때 주필로 논설을 썼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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