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Google+ LinkedIn Katalk +

이번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이다. 교회의 달력으로 고난주간 목요일에 열 두 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고, 금요일 정오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주간을 가장 엄숙하고 경건하게 지낼 일이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주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줄 믿고 또 그렇게 소망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그가 그린 여러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주목할 일이다. 그는 순교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사람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군중의 한사람으로 자신을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렘브란트는 자기 얼굴 모습을 통해서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라고 자신의 죄와 악역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고백하는 것이리라. 바꿔 말해서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고백일 것이다. 

어찌 보면 십자가는 대단히 모순적인 상징성을 담고 있다. 십자가에는 가장 무거운 고난과 함께 영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십자가에 드러난 고난과 영광이라는 모순과 역설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심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능력의 원천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은 한 주간 사이에 이루어진다. 이 한주간은 역사상 가장 긴 주간이며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뒤바꿔 놓은 한 주간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움의 상징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움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께서 하나님 되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가장 몸서리나는 잔혹한 처형방식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됐다. 가장 비극적인 십자가가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랑이요, 찬양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감상적인 눈으로 보면서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의 죄를 생각하면서 떨림과 두려움과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구원은 어떤 놀라운 기적을 동반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희생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하고 묻는 질문에 우리는 모두 신앙적인 양심을 가지고 겸손히 대답할 의무가 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는 물음에 대하여 “네,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진정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둡고 괴로운 고난주간이 끝나는 날, 우리는 감격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고난주간이 끝나는 부활절 새벽에 우리는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환희의 찬송을 부르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