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Google+ LinkedIn Katalk +

코로나가 오고 벌써 세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코로나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코로나가 오고 세 번째 맞는 봄은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그래서 정부도 코로나 때문에 봄꽃축제는 하지 못하게 했지만 개인적으로 꽃구경은 할 수 있게 막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상춘객이 꽃나무 아래에서 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속에서도 봄꽃들은 어김없이 피어납니다. 4월은 부활의 달입니다. 그런데 100년 전 1922년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친한 친구 베르드날이 전사하는 큰 아픔을 겪습니다. 친구를 잃은 상실감을 당시에 세계대전으로 사람들의 황폐해진 정신 상태를 황무지에 비유하며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것은 영국의 중세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지오프리 초서가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4월은 희망의 달이라고 하는 것을 뒤집은 것입니다.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하든, 4월을 희망의 달이라고 하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해마다 4월이 되면 꽃들이 만발합니다. 겨우내 죽은 것 같았던 나무에서 하얀 꽃, 노란 꽃, 연분홍 꽃들이 피어납니다. 4월의 꽃들을 보고 있으면 4월은 분명 부활의 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 추운 겨울을 이기고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부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모든 인류의 궁극적 희망입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날 때 자기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모르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땅을 떠날 때도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고 죽어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잡았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가장 잔인합니다. 사랑의 속성 중의 하나가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그 사람이 생각나고, 생각나면 만나고, 만나면 헤어지고 싶지 않고, 그래서 결혼해서 일생을 함께합니다. 그런데 결국 죽음이 찾아오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인류가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인류는 영원히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한다면 인생은 참으로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의 값으로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담부터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물론 나사로도 다시 죽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려주시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날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에베소에서는 맹수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에 대한 말씀을 마치면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범진 목사

<하늘기쁨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