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을 십자가의 연약함을 통해서 나타내셨고, 무한한 지혜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나타내셨다. 십자가의 신비는 그 십자가를 조롱하고 부인하는 이들을 통해 아이러니를 만들어 낸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께 쏟아진 모욕과 조롱 가운데 세 가지 아이러니가 나타났다.
첫 번째 아이러니는 그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했던 예수님은 실제로 왕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가 붙여졌다. 원래 대제사장들은 죄패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빌라도는 자신의 고집대로, 그냥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왕의 종말이다. 이 나라의 왕은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가 되었다. 왕이 이렇다면 그런 왕을 둔 나라는 얼마나 형편없는 나라인가?” 빌라도는 이 죄패를 더욱 큰 모욕을 주려고 썼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진리를 죄패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두 번째 아이러니는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조롱 받았던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남을 구원한다더니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하시지 않음으로써 남을 구원하시는 분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결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실 수 없었다. 메시아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하는 능력이 아니라 불의한 십자가를 참고 인내하는 능력이다.
세 번째 아이러니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절규하셨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한탄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버리실 만큼, 제가 세상의 모든 저주를 받아야 할 만큼 그토록 크시군요!”라는 고백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전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계속 임하고 있었다. 암흑은 하나님의 저주의 증거이다.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 어두움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잠시 동안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버리셨을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전히 붙들고 계셨고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멸시와 조롱속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버리신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너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였듯이 너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면 머지 않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역설로 드러날 것이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길이다.”
이재훈 목사
<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