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지성] 사심 없는 부단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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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슬피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기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라고 책망하셨다.

포에니전쟁(Poenic War, 264~146)을 통하여 서구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로마는 대토지소유제도(Latifundium)가 발달하여 많은 토지가 귀족들에게 집중하였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부르짖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귀족들에게 살해당했고, 농지개혁법의 부활과 곡물법 제정을 부르짖던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cchus)는 자살하였다. 대토지를 소유한 로마의 귀족들은 계속해서 농지개혁을 외면하였다. 그후 군인황제시대(235~284)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와중에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마침내 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476).

서양근세 초기에 종교개혁의 거대한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개혁의 선구자들을 보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독일의 후스(Jan Hus), 프랑스의 왈도(Waldo), 스위스의 츠빙글리(Ulrich Zwingli), 그후 루터(Martin Luther), 칼빈(John Calvin)에 의해 종교개혁의 불길은 더욱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1천 년의 질서를 새롭게 개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개혁을 거부하는 세력과 30년 전쟁이란 불행한 역사를 거쳐 마침내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1648)에 의해서 신앙 선택의 자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3정이 문란하였다. 탐관오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전봉준(全琫準)을 필두로 동학농민운동(1894)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생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일본에 망명했던 개화파들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위세를 업고 돌아와 일본식으로 신분제 폐지, 인신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을 골자로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1895)을 하였으나, 일본의 조선 지배 의도가 점차 드러나면서 조선인들의 반발로 근본적인 개혁이 이룩되지 못하였다. 

어느 정치 체제든 어떤 정치 이념이든 완벽한 체제나 이념은 없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나 사회제도, 심지어 정신 분야를 다루는 종교 제도까지도 완전무결한 제도는 없다. 개혁을 하고 나면 또 다른 모순이 생기고 부패 구조가 발생한다. 그래서 헤겔(G.W.F. Hegel)은 정반합(正反合)의 이론을 통해서 부단히 합리적으로 개혁해 가는 이성국가(理性國家)를 바람직한 국가로 주장하고 있다. 현재 남북한 겨레들은 좌우 이념과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내로남불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한의 현실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사심(私心)을 버리고 미래의 발전적 희망을 향해 모순된 것들을 과감하게 부단히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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