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광해군에 대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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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는 518년간 27명의 임금(왕)들이 있었다. 그중에 2명은 왕이 아니라 군(君)으로 불리고 있다. 연산군(1476–1506 / 재위 기간 1494.12.-1506.9 / 11년 9개월간)과 광해군(1575-1641 / 재위 기간 1608.2.-1623.3. / 15년 1개월간)이다. 연산군은 자질이 부족한 일을 많이 저질렀기에 폭군으로 분류하는 게 이해되지만 광해군은 조금 다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수습하고 전후 처리에 힘쓴 현군이었지만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피난지인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다가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게 됐다. 이에 광해군은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국난극복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서울이 수복되고 조선의 국방을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 업무를 주관하게 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도에서 의병 모집과 군량미 조달을 맡았었다. 1608년 선조의 지병이 위독하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소북파(小北派)의 유영경(柳永慶)이 이 교서를 감추었다가 발각되자 광해군은 유연경에게 사약을 내려 처벌했다. 광해군은 극심한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중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지만 당시 집권층인 대북파(大北派)의 책략에 밀려 성사되지 못했다. 1613년엔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의 역모 관련 사건이 발생하자 김제남에게도 사약을 내려 사사시켰다. 그리고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圍籬/귀양사는 집의 둘레에 가시나무 울타리로 가두는 일)안치 했다가 다음 해 죽이고 인목대비도 서궁에 유폐했다(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9세 연하였음). 이런 일들은 대북파(大北派)의 당론에 의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전후(戰後) 복구에 최선을 다했다. 양전(量田)과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히고 재원을 확보하고 선조 말기에 시작한 창덕궁, 경덕궁, 인경궁의 증건도 완성했다. 대외적으로도 탁월한 외교 실력을 발휘했다. 명(明) 나라가 원병을 요청해오자 일단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명 정도 군사를 주어 명나라를 돕게 한 후 부차(富車) 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後金)에 투항하게 함으로써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절묘한 등거리 외교를 유지했다. 일본과도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을유약조)를 체결하여 임진왜란으로 인해 중단된 외교를 재개하였다. (요즘 美·中 대립 속에 한국의 외교, 대일관계 복원에 좋은 시사점을 준다고 본다.) 광해군 집권 기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파의 이귀(李貴)와 김자점(金自點)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조(仁祖/1595-1649/재위 기간 1623.3.-1649.5./26년 2개월)를 옹립(인조반정(仁祖反正))했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때 집권한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군을 적폐(패륜적인 혼군(昏君))로 규정한 것이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당시 폐위 논리로 내세운 것이 ① 의리와 명분에 위배되는 중립외교를 했고, ② 살제폐모(殺弟廢母)를 했다는 것이었다. 인조반정 후에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서인들의 무모한 정치로 인해 국토는 침략을 받아 초토화되고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그나마 왕조 자체가 교체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광해군의 경우를 통해 한 명의 현군(賢君)이 갑자기 폭군(暴君)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사는 반복되기에 현대사에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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