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당시에 장덕로, 이승길, 김경하 목사 등 산동선교 폐지론자들은 고난(苦難) 당하는 동포 전도와 구제, 교육은 못 시키면서 많은 돈을 중국 산동선교에 허비하기보다는 해외선교는 폐지하고 동포들을 위해 돈을 쓰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영훈 목사는 선교 가폐론자들과 불가폐론자들에게 좀 더 구체적인 질책과 아울러 방안을 제시하였다.
“나도 몇몇 형제(兄弟)의 여론(與論)을 청취(聽取)하는 대로 산동선교를 가폐(可廢)하는 자(者) 불무(不無)하나 그러나 불가폐(不可廢)라 하는 자 역다(亦多)하다. 나는 불가폐라 하는 자와 가폐라 하는 자(者)를 집중(執中)하여 권고(勸告)하고 싶다. 불가폐라고 공연(空然)히 떠들지만 말고 부활일(復活日) 연보(捐補)만 잘 나게 하자 그러면 외지동포(外地同胞)를 목양(牧養)하고 산동선교는 더욱 잘 될 것이요 또 가폐(可廢)라고 격노(激怒)치만 말고 부활일 연보를 극력(極力)하자 그러면 산동 미거(美擧)를 폐(廢)치 않고도 재외동포의 목양이 잘 될 것이다. 만사(萬事)가 설폐(說弊)보다 구폐(救弊)가 중요하다. 산동선교와 동포목양을 양전(兩全)케 할 구폐책(救弊策)은 부활일 연보를 감사일 연보와 동일(同一)케 하는 외(外)에 타법(他法) 무(無)한 줄로 지(知)한다.
나는 자긍(自矜)이 아니라 산동선교와 동포목양(同胞牧養)을 편폐(偏嬖)치 못할 줄로 지(知)하고 작년(昨年)부터 부활일 연보를 감사일(感謝日) 연보와 꼭 같이 각(各) 백원(百源)을 전도국에 송교(送交)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감사절 헌금으로 시행하던 해외 산동선교를 폐지할 것이 아니라 부활절과 감사절 헌금을 힘껏 드려서 동포목양과 해외선교를 둘 다 힘쓰자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정신(精神)은 적극적(積極的)이요 소극적(消極的)이 아니니 하사(何事)를 물론(勿論)하고 선사(善事)이면 차(此)만 위(爲)하여 피(彼)를 불고(不顧)하지 말며 피(彼)만 위(爲)하여 차(此)를 편기(偏棄)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1927년의 산동선교 폐지 움직임은 김영훈 목사가 글을 발표한 이후 그해 가을에 그가 총회장에 당선되면서 잠잠하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산동선교의 개척자이자 폐지(廢止) 위기에 처한 산동선교를 지속시킨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1927년 9월에 개최된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폐지가 거론되던 ‘외국 전도사업’은 1927년 9월 1일부터 1928년 8월 31일까지의 외국전도비 예산서를 포함해 외국전도부 부장 차재명 목사가 보고한 대로 가결되었다.
1927년은 중국 산동선교 폐지문제와 중국 동란(動亂)으로 어지러운 형편이었으나 방효원(方孝元), 박상순(朴尙純), 이대영(李大榮) 선교사 가족은 중국 산동을 떠나지 아니하고 여전히 활동하였다.
중국 동란이 발생하자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피신하였으나 우리 선교사들은 피신하지 아니하고 각 교회를 심방하며 중국 교인들을 위로하여 우리 선교사와 중국 교우들 사이의 애정이 더욱 친밀하게 되었다.
산동 선교사 박상순 목사와 그 가족은 1927년 8월 초에 안식년으로 귀국하였으며 박상순 선교사는 김영훈 목사가 총회장으로 피선된 제16회 총회에 참석하여 성경 고린도전서13장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 중국 산동선교 형편을 보고하였다.
총회장에 당선되어 후배 산동 선교사 박상순 목사의 선교보고를 듣던 김영훈 목사의 감상은 남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김영훈 목사는 장로회 총회장의 중임을 맡아 총회의 각종 사무에 관여하였으며 고(故) 언더우드 박사 기념비 제막식 위원과 10월 27일, 신의주에서 열리는 의산노회 제1회 주일학교 대회 대회장, 의주 서교회 목회, 의산성경학교 선생(先生)으로 활동하였다.
김영훈 목사와 의산성경학교 선생으로 수고한 사람들은 한석진, 유여대(劉如大), 안승원, 박린도(朴麟道), 김도순(金道淳), 정상인(鄭尙仁) 목사이다.
의산성경학교 선생으로 활동한 정상인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으나 의산노회를 떠나서는 봉천서탑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1938년에 봉천(奉天-중국 심양) 노회장이 되고 이후에 만주국(滿洲國) 포교(布敎)관리자, 만주기독교총회(滿洲基督敎總會) 총회장, 협화회 촉탁, 만주신학원(滿洲神學院) 원장을 지내면서 일제의 괴뢰국가 만주국 종교정책에 수행에 있어서 선봉장이 된 사람이다.
물론 이름도 도산광웅(島山光雄)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 하였다.
초대 김덕선(金德善) 목사 부임으로 1913년에 시작된 봉천 서탑교회는 만주 지방의 대표적인 한인(韓人)교회로 성장하여 백영엽 목사 다음으로 이석락(李晳洛) 목사가 시무하였으나 이석락 목사가 7계명을 범하여 충격과 실망 속에 있다가 정상인 목사가 담임하게 된 교회이다.
김영훈 목사 역시 1913년 중화민국 산동선교사, 미국에서의 국민회 활동, 귀국 후에 의주 양실학교 교장, 의주 서교회 위임목사, 의산노회장을 거쳐 1927년에 제17대 장로회 총회장이 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독교 지도자로 널리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다.
고린도전서10장12절 하나님 말씀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기록된 대로 과거에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넘어졌던 사실들을 보고 오늘날을 사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더욱 근신하면서 넘어질까 조심하여 세상과 타협하거나 교권과 욕심을 못 버리는 추태(醜態)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김영훈 목사는 1927년 9월에 열린 장로회 총회 이후 10월 27일부터 신의주제일예배당(新義州第一禮拜堂)에서 개최된 제1회 의산노회 주일학교 대회장으로 노회 50여 교회 대표 550여 명과 타 노회(老會) 인사 50여 명이 출석한 가운데 대회를 진행하였다.
매일 저녁 강연회에는 1500~1600명이 회집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으며 전람부에서는 라디오를 설치해 경성과 상해에서 오는 모든 소식을 듣게 하여 큰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의주 청산유치원 원장도 맡고 있었기에 1927년 12월 8일 밤에는 청산유치원 학예회 사회를 맡아 학부모들과 어린이들의 유희와 창가, 연설, 독창 순서로 동심(童心)의 세계에 빠지기도 하였다.
김영훈 목사가 시무하던 의주 서교회 교우 가운데 리향림 여사(女士)는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사람이니 그녀는 1927년에 성경(聖經)통신과를 졸업하였으며 아름다운 자격에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이로 널리 소개되었다.
리향림 여사의 성경통신과 졸업식은 1927년 음력 9월 18일에 김영훈 목사 사회로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상품으로 성경 1권을 수여(授與)하였다.
의주 서교회 담임 김영훈 목사는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西部洞)에 위치한 청산(靑山)유치원 원장도 맡고 있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