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12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9)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10)”
십자가와 죽음이 복음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순결하게 피어오른 백목련과 함께 죽음을 떨고 일어난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아침입니다. 갈릴리로부터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죽음과 묻힌 무덤까지 확인했던 여인들이 잠 못 이룬 사흘 후 이른 아침에(very early morning) 향유를 손에 들고 무덤을 향하고 있습니다.
죽은 시신이 무덤 안에 있을 주님으로 당연한 생각을 넘어 빈 무덤과 두 천사를 만납니다. 말씀대로 주는 살아나셨느니라. (9:22, 17:25, 18:32-33) 말씀만 들어도 떨리는 가슴 어떻게 뛰어갔는지 문을 잠그고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하지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말씀으로 수차 가르치셨음을 조금만 생각했더라도, 빈 무덤의 사건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거나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마리아의 증언을 무시하지 않고 생각해 보았어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큰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을 인간의 고정관념과 단순함을 보게 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제자들이 합심하여 기도했더라면 성령님이 깨우쳐 주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운 생각을 가져 봅니다.
주님의 죽음의 화가 자기들에게 미칠까 봐 우왕좌왕 두려워하고 당황했을 뿐 믿음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제자들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와 복음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령님의 깨우침이 없이는 감히 누구도 알 수 없는 부활에 대한 신앙의 신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도 새벽을 깨우는 여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 이천 년 동안 쉬지 않고 흐르고 흘러 버림받은 동방의 땅끝 조선에 복음 한국을 세우셨음을 감사하게 합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 선교사님이 조선 땅을 밟았다 하심은 마리아의 정신을 상상해 보는 것이 지나침이 아니겠지요. 과시적이고 힘자랑하는 남성들보다 약하고 미숙하게 취급당한 시대에 십자가 앞에서도 여성들이었고 부활의 아침에도 여성들이 동원되는 것이 성경의 첫 번 부활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미련한 자를 통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부활절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연약한 여성들을 통해 부활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십니다.
주님, 위대한 복음의 소식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요. 새벽을 깨우는 여인들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오늘도 복음에 목말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살게 하소서. 빚진 자의 정신으로 선교했던 한국교회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코로나19로 침체했던 선교가 다시 일게 하소서. 첫 번 부활절 아침 주님을 향한 달음질치는 마리아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김유수 목사
<광주 월광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