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자신들의 신을 믿기를 바란다면 노래를 보다 더 잘 부르고, 남들보다 구원받은 사람들답게 얼굴에는 팔복의 즐거움이 나타나야 할 거야. 나는 춤추는 신만 믿을 수 있네” 니체는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 기쁨과 즐거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즐거움을 모르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성경을 정확하게 읽지 않았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춤추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잔치를 열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즐거움에 초대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시키시려고, 일손이 필요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칭찬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누어준 것은 그들을 통해 어떤 이익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을 종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는 “사람의 제일 되는 의무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기독교 지성인 C.S.Lewis도 동일한 맥락의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라고 명령하시며, 우리가 그분을 즐거워하도록 초청하고 계신다(In commanding us to glorify Him, God is inviting us to enjoy Him).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드리는 때는 언제인가? 우리가 하나님 그분 자신을 가장 즐거워할 때이다. 다윗의 믿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믿음이었다. 그가 인생의 수많은 고난 속에서 그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믿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믿음이었다.
광야에서 생명의 위협에 처했거나 왕권에 심각한 도전을 받고 도망중에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믿음을 고백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 특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특권이자 의무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하시는 즐거움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풍성히 누리도록 넘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은 항상 기쁘다. 그 마음은 갈등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즐겁게 행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행복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즐거움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 신뢰해야 할 분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즐거움을 바라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으로 초대하고 계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속으로 들어갈 때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재훈 목사
<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