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문사에서 발행한 한국기독교대백과사전은 김영훈 목사의 사망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대의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9년에 별세했다.”
1998년 6월 27일자 한국기독공보(韓國基督公報) 역시 제16대 총회장 김영훈 목사를 소개하면서 “그가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9년에 별세했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사망 관련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대표해 중화민국 선교사로 활동했고 총회장을 역임했던 당대의 인물이었으나 그의 사망 기사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말년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김경하(金京河) 목사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김경하 목사는 윤하영(尹河英) 목사가 총회장이던 때의 겨울에 의산노회 사경회 강사로 초빙된 일이 있었다.
윤하영 목사는 1939년에 의산노회장이었으며 1939년 9월 8일부터 신의주 제이예배당에서 개최된 제28회 총회에서 홍택기 목사에 이어 총회장에 당선된 사람이다.
김경하 목사는 윤하영 목사가 총회장이 된 그 해 겨울에 의산노회 종교교육 부장이던 최득의(崔得義) 목사 초청으로 홍대위(洪大偉) 목사와 같이 의산노회 사경회 강사로 가게 되었다. 사경회 장소는 총회장 윤하영 목사가 시무하던 신의주 제일교회였다.
김경하와 홍대위 목사는 여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경회가 시작되던 날 저녁, 초종(初鐘)을 친 다음에 윤하영 목사가 여관 문 앞에 이르러 “그 자들이 사경 강사가 신사참배(神社參拜) 하고 와서 사경회를 시작하고 합니다. 할 수 있소? 잠깐 같이 갔다 오십세다”라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인력거에 타라고 했다.
그리하여 김경하와 홍대위 목사는 윤하영 목사와 함께 신의주 신사 앞까지 가서 신사가 있는 담 안에는 들어서지 않고, 대문 밖에 인력거를 세우고 내렸다가 다시 그 인력거를 타고 신의주 제일교회로 간 일이 있었다.
김경하, 홍대위, 윤하영 모두는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순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8년에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홍택기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고 평양, 평서, 안주 등 3개 노회의 연합대표 박응률 목사(평양노회장)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제안 건을 채용하기로 가결했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장로회 총회는 이어서 김길창 부회장과 각 노회장으로 총회를 대표해 즉시 신사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했다.
1938년 가을 신사참배 가결 총회 이후 신사참배에 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모진 고난을 각오해야만 했다.
김경하 목사가 신의주를 방문하던 당시 신의주에는 총회장 윤하영 목사가 시무하던 신의주 제일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신의주 제이교회를 비롯해 제6교회까지 있었다.
김경하 목사는 그 사경회 기간 중, 어느 날 저녁 대접을 받으러 가는 길에서 김영훈 목사를 잠시 만났던 일을 언급하면서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며 말을 맺고 있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종교보국(宗敎報國)을 내세우며 1945년 일제 패망 전까지 순응하면서 부일협력했다.
중국 선교사로,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로, 귀국해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던 김영훈 목사는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총회마저도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일제의 노리개로 전락하자 깊은 고뇌와 탄식에 이르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의 “싸우자”라는 제목의 설교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남아 있다.
“아! 나아가 싸우자. 대저 방법은 입장을 따라 변하나니 생지(生地)면 지키고, 사지(死地)면 싸우며, 국내면 지키고, 국외면 싸우며, 평안한 때면 지키고, 위태로운 시기면 싸운다.”
김영훈 목사는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되던 초기에 예수교 신앙을 받아들인 인물로 한학(漢學)을 전공했고 조사와 장로(長老)로 활동하면서 의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서구 선교사를 가까이서 대할 수 있었으며 신학 공부를 하면서 신앙과 신학의 기반을 다지었다.
김영훈 목사는 한학(漢學)과 신학문(新學問)을 다 공부한 인물이자 조사와 장로로 활동한 인물로 신학교를 졸업하자 곧 목사안수를 받았고 곧바로 중국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목적하던 타문화권 전도와 교회 개척사업에 적합한 인물로 인정을 받아 선택된 사람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타문화권 선교사로서의 소정의 교육과 훈련들을 받지 못하고 나간 것은 아쉬운 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문(漢文)에 능(能)한 중국 개척 선교사 김영훈 목사는 선교 초기에 필담을 해가면서 개척전도 활동을 하느라 많은 수고를 다 하였으며 동료 선교사들과는 연합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김영훈 목사는 중국 개척 선교사로 일했고 미국에 건너가서는 도산 안창호의 홍사단에 가입해 교포 대상 목회와 독립운동을 했으며 귀국 후에는 고국에서 목회와 교육 사업, 총회사업에 힘쓰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었다.
김영훈 목사는 초기 한국 교회 인물 가운데 한반도를 넘어 중국과 미국 대륙에서 폭 넓게 활동했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가 중국 선교사로 선택되어 중국에서 계속 일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해 중국으로 다시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은 끝내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부르심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중국 대륙으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 개척 선교사로 수고했던 김영훈 목사의 수고와 헌신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날 래양교회(萊陽敎會)에는 1,000여 명의 중국교우들이 주님을 찬양하며 섬기고 있으며 앞으로도 복음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김영훈 목사가 미국에서 중국인 회당에서 중국말로 조국 대한의 독립을 위해 외치던 부르짖음 역시 상달되어 일제는 패망하고 조국은 독립되었으며 자유 대한의 교회는 세계2위의 선교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선교대국이 되는 그 첫 출발선에 김영훈 선교사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과거의 성공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로 성장해야 하며 잘 준비되고 적합한 인물들이 중국과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끝>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