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진통일과 연세대학교 신문 창간호
조금 있으면 6.25 남침전쟁 기념일이다. 언더우드가 세웠고, 명예총장 언더우드 2세의 부인이 자택에서 공산 게릴라의 흉탄에 의해 서거하고, 그때 얻은 심장의 충격과 병약을 붙들고 공산주의 남침의 대한민국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찾아와 사명을 다하던 중 1.4 후퇴 후 2월 부산의 한 초막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 언더우드 2세, 이 연세대학교의 달력에 6.25 남침전쟁 기념일 표시가 없다고 들었다. 기가 찬 노릇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은 망하고 만다.
1953년 6월 26일에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대학 신문이 창간되었다. 그 창간호 1면 상단에 <우리의 맹서> 세 가지가 반듯한 모양으로 박혀있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령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이 창간호는 7월 27일의 휴전 한 달여 전에 발간되었다. 거기 이승만 건국의 다섯 번째 기둥 북진통일의 염원이 역력하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입국론의 네 기둥 외에 남은 한 가지 기둥이 북진통일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의 자유통일 체제로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것이다.
2. 6.25 남침전쟁이 노출시킨 공산주의의 실상
해방이 되고 언더우드 2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적국 국민으로 분류해 가둬 두었다가 강제 귀국조치를 당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해방이 되고 언더우드 2세는 미군정 장관 고문의 자격으로 그가 태어났고 일생 선교사로 몸 바쳐 헌신해 온 한국으로, 조선기독교대학(현 연세대학교)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만 2년 동안 군사정부와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거기에 많은 어려움과 많은 실수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점령군 안에 일부 부패가 있었다. 그러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내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장교와 사병들의 공을 인정해야만 한다.”
언더우드는 계속해서 6.25 남침전쟁에 대해서 쓰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실수와 동요가 사실일지라도, 우리는 군사적 공격에 대한 책임을 여전히 모스크바에 물어야만 한다. 그것은 활에서 떠난 화살처럼 확실히 러시아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세계는 모스크바가 위성국가에 대해 유지했던 철권통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어서, 그 점에 대해서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충돌을 내전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1945년 10월부터 1950년 1월까지 한국에 있었다. 그동안 북한에서 내려온 수 백 명의 피난민들을 만나서 인터뷰했으며, 북한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의 보고서를 보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인터뷰한 많은 다른 사람들과 대담을 했다. …남한의 거의 전 지역에 대한 공격과 점령은 이들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가 진정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류금주 목사
<전 서울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