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부산으로 내려가 부모님이 안내한 초량천주교병원 <현 성분도의원>에서 축농증 코수술을 받았다. 쟁반에 수북히 쌓인 수술 도구와 피 닦을 붕대와 솜도 산같이 높게 옆에 쌓아두고 양쪽 나의 코부분만 마취해 놓고 원시적 방법으로 수술할 때 어찌나 아픈지 수술하는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열쇠구멍으로 나의 수술 광경을 보신 아버지는 마치 소잡아놓은 것 같더라고 말씀하셨다. 일주일 입원 중에 수녀의 심방을 받았다. 오른쪽 코 다음 열흘 만에 하는 왼쪽 코수술은 너무 아파 포기하겠다고 수녀에게 말했다. 어머님이나 누님처럼 인자한 수녀님은 “학생, 남자가 그렇게 용기도 없어요? 남은 코수술 안하면 먼저 코수술한 것도 무효가 되쟎아요.” 나는 수녀의 위로와 권면으로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왼쪽 코수술을 마쳤다. 수술하며 의사는 “학생 잘 참는데 이 다음에 큰 사람 될 거야”라고 칭찬해 가며 고통의 코수술을 끝내 주었다.
나는 인자한 수녀님 권면에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질문했다. 수녀는 삼각형 하나를 종이에 그려놓고 각과 변이 몇 개냐고 물었다. 각각 세 개라고 대답하니 그러면 삼각형은 몇 개냐고 내게 물었다. “하납니다”하고 대답했더니 수녀는 “학생 삼위일체설은 이와 똑같아요. 더 묻지 마세요. 더 이상 나도 몰라요”하는 게 아닌가. 축농증 코수술 치료를 다 마치고 나는 수녀가 알려준 대로 돈암성당에 나갔다. 두 달을 나가도 어디서 왔느냐 묻는 성도 하나 없었다. 1시간 미사 끝나면 숙부댁에 와 대입시 공부에 열중했다. 미사 중에 신기하고 궁금해 성채를 한 번 신부에게 받아 먹은 용기를 보였다. 한주간 죄 지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신자만 신부의 성채를 받아 먹는 것인데 고등학생 용기로 한 번 성채를 받아 먹은 경험이 있다.
고3 가을에 숙부댁이 용산으로 이사를 했다. 근처 성당을 찾아봐도 없다. 그런 가운데 학교에서 3일간 가정실습기간을 전교생에게 베풀 때 나는 책가방을 들고 부산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나는 서울 숙부님 전보를 받았다. “동춘아! 네 책이 다 탔다”라고 쓰여 있다. 어머니와 함께 급히 상경했다. 불탄 숙부댁 집터에 아직도 김이 솟고 있었다. 이웃 제재소 화재로 숙부댁 용산 쌀창고까지 다 탄 큰 화재였다. 더 이상 숙부댁 신세를 질 수 없었다. 용문고 3-2반 같은반 김희성 친구와 함께 자취를 하기로 상의했다. 찾아간 아현동 자취방은 초가집 문간방으로 좁아 보였다. 동네가 초가집 투성이로 극빈지대였다. 어느 수요일 밤 친구가 교회에 가자고 했다. 스스럼 없이 따라갔다. 판자집 산칠교회였다. 성경도 찬송가도 모르는 나는 좀 어색했다. 그래도 교인들이 하는 기도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등부에서 잠깐 신앙생활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주일학교 반사를 했다. “샛별 같은 두 눈을 사르르 감고” 어린이 찬송이 은혜로웠다. 청년부 회장인 나를 돕는 부회장 안 집사가 나와 반사활동을 잘 했다. 가끔은 당인리 발전소가 있는 한강변 강둑에서 대화도 나눴다. 대학 졸업 후 진해에서 해병생활을 하며 사랑편지를 주고 받았다. 교편을 잡으면서 안 집사 청년은 나의 아내가 되었다. 산칠교회는 내게 믿음 좋은 아내까지 준비해 주셨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산칠교회 최명환 담임목사님은 내게 캐나다 선교부 장학금도 받게 도와 주셨다. 나를 전도한 친구는 목사가 되어 활동했다. 화곡동으로 이사오면서 합신교단 화성교회로 출석하며 근 70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 부산에서 나를 심방해 주신 수녀님 추억 속에 늘 고맙다. 용산 숙부댁 화재로 마포구 아현동 산칠교회 새신자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나는 오늘도 나의 기도제목 하나 가제시 <하나님 나라 겨레 가정 제자 시문학>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