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파가 건국대통령 마지막길 전송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 최대 꿈이었다
이승만은 1965년 6월 20일부터 병이 악화돼 7월 19일 임종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건국했고, 전쟁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해내며 전 생애를 아낌없이 불살랐던 위대한 한국인 이승만, 그는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고국에 돌아오기를 고대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그가 건립한 한인교회에 안치되었고, 그의 시신은 얇은 베일로 얼굴을 덮고 상반신을 볼 수 있도록 관의 반은 열려 있었다. 한 시간 동안의 영결예배가 끝나자 영구는 하와이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검은색 리무진에 실려 히캄 공군기지로 떠났다. 프란체스카는 두 번이나 졸도함으로 서울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밴 프리트 장군은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미군 특별기에 동승하여 한국으로 와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했다.
7월 22일 김포 공항에 도착한 유해는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었는데 육군본부교회에 이승만 박사가 참석했을 때 군목으로 설교하던 박치순 목사가 비행장에서 영접예배를 인도했다. 7월 27일 시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영결식이 거행되는 동안 광화문 일대와 서울시청 앞, 남대문과 서울역 거리에는 수많은 인파가 나와 운구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결식을 마치고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하는 운구행렬을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이승만은 국립묘지에 묻혔다.
[이승만 대통령 묘 앞쪽에 있는 “헌시”]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리 승만 박사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해를 거듭할수록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위해 예비된 선지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여준 독립정신과 건국정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젊은 세대에게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알려야 한다. 그 시대에 군주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유민주주의와 공화제가 왜 필요한지 역설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정치가이며 나라를 위해서 한평생 바친 분”이라고 (사)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박진 회장이 말했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의 어떤 지도자도 따라할 수 없는 리더십과 외교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애국 계몽운동과 항일 독립운동, 국가건설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적 깨우침만이 우리 민족과 국가의 살길이라 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자유를 굳건하게 지키고 남북통일을 이룩하도록 국력을 길러 지금의 난국을 극복하는 애국사상과 신앙으로 추진해 나가야함을 깨닫게 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 최대의 꿈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달란트로 믿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유언으로서의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 5장 1절)였다. <끝>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