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성급 만찬자리에서 나희필(羅熙弼, 1926~1993) 장군 담당사단의 모범적인 상황을 보고받고 기분이 한껏 고무된 박대통령이 나 장군에게 친히 가득 부어준 축하의 술잔을 놓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대통령이 따라준 축하주를 어찌해야 좋은가? 대통령은 술잔을 들고 나희필 장군이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30초가 30분처럼 길었다. 동석자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나 장군은 “각하! 저는 술을 못합니다. 저에겐 사이다로 한잔 주십시오!” 박대통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 장군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대통령이 친히 술을 따라 내민 술잔을 딱 잘라 거절한 전례가 있었을까? 대통령의 굳은 표정을 본 국방장관이 순간 벌떡 일어나, “각하 ‘나(羅) 장군’은 원래 술을 못합니다. 그 잔은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하고 잔을 뺏다시피 하여 단숨에 마셔 버렸다.
대통령의 체면 손상! 그 위기의 순간을 국방장관의 기지로 일단 넘겼지만, 만찬장의 분위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은, 의기소침해 있던 나 장군에게 다가가더니, “자네가 진짜 기독교인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만찬장을 떠났다. 아마도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공식 만찬 석상에서 축배를 거절을 당한 예는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날 만찬이 끝났을 때, 박종규 경호실장이 나희필 장군에게 다가와 “선배님, 해도 너무 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각하에게 망신을 주었어야 합니까? 국군의 통수권자요 일국의 대통령께서 손수 축하의 술잔을 권하면, 정중히 받아서 입잔(入盞)이라도 하는 척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분초를 따지며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과 얼굴표정 하나하나까지 살펴야 하는 경호 실장으로서 이날 일촉즉발의 그 순간의 초조함과 고뇌가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이 떠나간 후, 선배 장군들이 나 장군에게 찾아와, 군통수권자 앞에서 너무 경솔했다는 질책을 했다. “이 사람아 별을 하나 더 달 수 있는 하늘이 준 8년 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나? 내일 일찍 책상 정리나 하게!” 사단장 관사로 돌아온 나 장군은 정작 매우 불안해야 될 자신의 마음이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과연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내일 당장 청와대에서 어떤 책벌(責罰)이 떨어진다 해도 괘념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겠지, 내가 육사를 졸업할 때, 그의 직속상관은 그에게 장교가 되어 술을 마실 줄 모르면 출세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나를 이렇게 장군까지 진급시켜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라고 자위하면서 나 장군은 취침 전, 이날 있었던 일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신앙인으로서 일생을 사는 동안, 술을 가까이 하는 삶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말씀을 의지하는 삶이 더 신실한 삶이라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군복을 벗게 될 것이라 마음을 비우고 있던 나 장군은 아침이 되자 책상 정리를 끝내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문책은 오지 않고 오히려 별을 하나 더 달고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영전되었고, 다시 ‘3군사령부’ 창설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던 것이다.
나희필 장군이 전역 후의 일이다. 어느 날 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새벽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나 장군, 중앙정보부 차장보(次長補)를 맡아주시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시오.” 당시 ‘차장보’ 자리는, 중앙정보부의 막대한 예산 집행에 관여하는 요직이기 때문에, 청렴결백이 요구되는 인물을 추천해야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김재규 부장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국의 국가원수가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잔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한 믿음의 장군 ‘나희필’이야 말로, 그 어떤 압력도, 부정의 유혹도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잘 추천했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고 한다.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섬기던 나 장군은 1993년 68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군인의 신분으로 올곧은 믿음을 지킨 나희필 장군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귀감(龜鑑)을 본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