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서 가장 힘있는 신문은 발행 부수가 제일 많고 신문으로는 유일했던 ‘매일신보’였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이기도 했다. 이 신문에 ‘무정’을 절찬 인기리에 연재를 마친 춘원은, 다시 새로운 여행기를 연재하기 위한 여행 중에, 매일신문 사장인 ‘아베’의 주선으로 문제의 그 유명한 ‘도쿠도미’를 만나게 된다. 운명적인 이 만남은 1917년 8월 부산 부두에서 이뤄졌다.
이때 춘원의 나이는 혈기 왕성한 25세의 청년이었고 도쿠도미는 아버지뻘 되는 54세였다. 첫 만남에서 춘원은 이 자는 보통 사람을 뛰어 넘는 영향력과 실력이 대단한 인물로 여겨졌다. ‘도쿠도미 소호’는 기자 출신으로 60여 년간 일본 정계에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로, 당시 조선총독부를 마구 쥐고 흔드는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 만남에서 춘원의 글 솜씨를 추켜 올려주면서 그의 환심을 사려했다. 그러면서 현란한 논리와 말솜씨로 춘원을 사상적 우군으로 포섭하려 덤볐다.
그리고는 그의 저서 ‘소호문선’을 친필 사인해서 주면서 꼭 읽어 보라고 당부하면서 떠나갔다. 떠나면서 소호는 춘원더러 장차 자기 양아들이 되어 달라는 최고의 애정의 표시도 잊지 않았다. 그 후 춘원은 한참 고민하며 생각해 봤지만,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이, 그의 길을 고집스레 계속 걸어만 갔다.
그로부터 2년 뒤 도쿄에서 춘원은 그 문제의 ‘2.8 독립선언서’를 쓰는 등 대한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 일본 당국은 그 독립선언서로 초비상이었다. 점점 조여오는 일제 당국의 체포 위험을 피해 춘원은 즉각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그곳에 가서도 춘원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면서 춘원은 그곳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변지 ‘독립신문’ 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춘원은 이렇게 상하이 망명 2년 남짓만에 다시 귀국하여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냈다. 이 무렵에도 도쿠도미는 계속 춘원을 찾아와서 여러 가지 현란한 논리로 계속 춘원을 회유하였다. 늘 하는 말이 춘원은 조선에서 썩기는 정말 아까운 인물이니, 제발 형무소에 갈 일은 절대 하지 말고, 높이 출세할 준비를 하라고 매번 당부하곤 했다. 그런데도 춘원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소신대로 행동을 하다가 끝내는 사고를 쳤다.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이 크게 터진 것이다.
이 일로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춘원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미결수로 재판을 앞두고 있는 어느 날, 도쿠도미가 춘원을 다시 찾아와 형무소 소장 방에서 그와 특별면회가 이루어졌다. 도쿠도미는 여느 때와 같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춘원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그토록 당부했는데 내 말 듣지않고 기어이 사고를 쳤구먼…” “선생님! 오늘은 나를 나무라지 마세요! 나는 내가 할 일을 당당히 했을 뿐입니다.”
면전의 도쿠도미가 무안해 할 정도로 춘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도쿠도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춘원에게 바짝 다가 앉으며 지극히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춘원! 이번의 미결수들의 장차 처리계획을 내가 자세히 알아보고 왔는데… 이번에는 무척 고생을 하게 될 것 같아. 그래서 걱정이 많아.”
그러면서 도쿠도미는 들고온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비밀문서로 분류된 것 같은 붉은 줄 그어진 몇 장의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는 더 바짝 가까이 다가 앉으면서 속삭이듯,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춘원! 오늘 내가 진짜 중요한 비밀문서 하나를 보여 주지. 일급 ‘살생부’ 비밀문서야. 이렇게 되면 자네 조선의 유능한 청년들은 이제 서서히 다 죽을 거야! 천천히 끝까지 다 읽어 보고, 결정은 자네 몫이야. 이제는 자네가 알아서 할 일만 남았어! 분명한 것은 내가 총독부에 춘원이 글쟁이로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으뜸이라고 말해 줬어! 춘원이 지금부터 일제 당국에 협조만 잘 하면 이번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유치장에서 지금 모진 고초를 당하고 있는 안창호 선생은 물론, 조선의 유능한 인재들의 목숨만은 살생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내가 받아 왔다는 말일세. 바로 내가! 알겠나?”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