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에서 정식으로 직장을 가지려면 학생비자로는 안되었다. 그래서 변호사를 통해 노동 허가서(Labor Certificate)를 받았는데 학교에서는 아예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학교생활은 그런대로 즐거웠다. 학생들은 친절했고 잘 순종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몸집이 크고 나는 작아서 가끔 길에서 마주치면 Dr. Oh하고 내 곁에 와서 어깨를 ‘탁’ 치면 나는 왜소해지고 더구나 아직 박사 학위도 갖지 않았는데 그렇게 불리면 변명하기도 어렵고 괴로웠다. 이듬해 1981~1982년 대학 사진첩이 나왔는데 거기서 나는 박사가 아닌 것이 밝혀졌다. 그때부터는 학생들은 계속 Mr. Oh라고 불렀다. 그해 겨울 나는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도 그들은 계속 나를 Mr. Oh라고 불러서 어쩔 수 없이 미리 존칭을 받았으니 이제는 하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다. 학과의 교수들도 친절했다. 그들은 학구적이라기보다 브라운우드 토박이 신사들이었다. 운동경기를 좋아했고, 추수감사절에는 총을 들고 터키 사냥에 갔었다. 사냥 금지 기간이 아닐 때는 사슴이나 다른 짐승도 잡아 집의 통으로 된 냉동고에 넣어놓고 먹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주민들과 거의 접촉을 않고 살아서 브라운우드 동네를 잘 모르지만, 주일에 댈러스까지 운전하다 보면 브라운우드 시청이 나오고 얼마 지나면 또 코만치 시청이 나온다. 코만치 원주민은 미 남부 대평원의 승마 유목민으로 서부 오클라호마주로 쫓겨와 그곳에 본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 브라운우드 쪽에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브라운우드 시청인지 코만치 시청인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은데 그 광장에 주일이면 늘 시장이 열려 농산물들을 팔고 있어서 한국 시장을 보는 것처럼 반갑고 신기했었다. 말하자면 나는 미국의 아주 시골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봄철 뱀이 많이 나오는 계절에는 1년에 한 번씩 전 시민이 뱀 잡기 대회(Snake Round Up)로 요란을 떨었다. 뱀이 많은 고장에서는 뱀을 두려워하면 살 수가 없어서 그런 풍습이 생긴 것 같았다. 댈러스에 있는 한국인 중에는 몸에 좋다고 뱀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몇 번 도시락에 넣어서 냉동해 놓은 뱀고기를 사다 준 적도 있다.
브라운우드에 살면서 더 욕심이 생긴 것은 내가 영주권을 받으면 애들도 영주권을 받아 미국에 데려올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솔깃한 탐욕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백인 제일주의로 타민족의 이주를 싫어하면서도 가족이 떨어져 산다는 것은 비극이라고 애들을 들여와서 함께 살라고 안타까운 표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애들을 학생으로 이 대학에 초청해서 데려온 뒤 영주권을 받아 공부를 시키면 내국인으로 등록금도 덜 내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먼저 서울대학에 다니고 있는 큰아들을 데려오려 학생 초청장(I-20 Form)을 보냈다. 물론 아들은 서울대학보다 미국에 간다는 것이 신기해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대사관 면접에서 그는 거부를 당했다. 아버지가 영주권 절차를 밟고 있으므로 이것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영주하기 위한 꼼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대학 총장을 통해 가족이 떨어져 있는 것은 비극이라고 만나서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총장 명의 청원서를 한국대사관에 보냈으며, 텍사스주 상원의원이었던 벤슨 씨를 통하여 또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뒤늦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막아 주신 것을 감사했다. 그들은 후에 영주권을 받았지만, 미국에서 학부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대학원부터 시작하는 게 장학금도 받고 훨씬 쉽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복의 근원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