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희망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시각과 청각 잃은 대신 내게 주신 아내는 생명의 동아줄
앞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조영찬 씨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 1호 시청각장애인 박사. 분명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조영찬 씨를 시청각장애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조씨는 자신을 ‘삼관인(三官人)’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그에게 없는 시각, 청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에 게 있는 후각, 미각, 촉각에 집중해 달라 는 의미다.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한결같이 그 사람의 가장 취약한 점을 꼬집어서, 마치 그 장애가 그의 전부인 것처럼 만들어져 있습니다. 해당 장애를 뺀 다른 부분은 오히려 비장애인보다 더 건강할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극소의 장애로 그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를 자꾸 사용하면 마치 그 사람에게는 장애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인지와 사고를 왜곡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시청각장애인이라 해도 시각과 청각 외에는 모든 감각이 다 비장애 상태인데 시각 동시에 청각이라는 중복 장애를 입은 가장 극심한 장애인이라고 자꾸 강조하면 시각과 청각을 뺀 나머지 세 가지 감각마저 하찮고 미미한 것으로 축소되는 폐단이 따릅니다. 없는 것보단 가진 것에 집중하자는 의미로 ‘삼관인’이라는 용어를 고안해 보았습니다.”
삼관인 조영찬 씨는 2007년 나사렛대학교 점자문헌정보학과에 입학, 신학과로 전과하고 사회복지학을 복수 전공으로 졸업했다. 이후 신대원에서 목회학 석사, 일반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기독교상담학, 일반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보통 사람도 하기 힘든 공부를 15년간 이어온 데에는 조영찬 씨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까닭도 있다.
맹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를 졸업한 뒤에 안마사로 일을 시작하는 선후배들과 달리 조씨는 청각장애까지 있어 안마사 일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조영찬 씨는 안마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점자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니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작가가 되려면 많은 걸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씨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하지만 당시엔 점자단말기도 없고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통역 기술도 전무하던 때라 조씨는 대학 진학을 향한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다가 제가 본격적으로 대학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06년 일본의 헬렌켈러라 불리는 후쿠시마 교수님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일본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후쿠시마 교수님 역시 시각과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손가락 점자로 통역을 받아서 대학을 나왔고 당시에는 동경대 조교수로 활동하고 계셨어요. 그분을 비롯해 일본의 시청각장애인들이 매년 시청각 장애인대회를 열고 있었는데 그 대회에 초대받았던 겁니다. 그때 후쿠시마 교수님과 일본 시청각장애인들을 만나고 나서, 그들이 공부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고 대학 입학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나사렛대학에 입학해서 15년간 공부하게 된 겁니다.”
공부하면서 조영찬 씨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그의 장애 때문이 아니라 졸업 후 진로를 꿈꿀 수 없다는 막막함이었다. 처음에는 대학교 학부 과정만 마치려고 했던 계획은 졸업 후에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계속 공부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결국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된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가장 기뻤던 기억이 언제인지 묻는 질문에 조씨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삶의 여정이 평탄치 못했다는 의미였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었고 저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삶의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든 외로움과 고민을 혼자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제 삶에서 기쁨이나 보람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신학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걸어온 배움의 과정이 나름 보람이라 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큰 기쁨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은, 어렵게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점은 졸업 후 진로가 열려 있지 않다는 점이었어요. 무엇 때문에 비전이 보이지 않는 이 어려운 공부를 힘겹게 감당해야 하는가 회의가 밀려와 공부에 대한 의욕을 유지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막막한 진로와 공부에 대한 회의로 힘겨울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조영찬 씨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그의 아내 김순호 씨였다. 조씨는 아내 김순호 씨를 “내게 동아줄과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맹학교에 다니던 시절 평범하게 안마사로 살아갈 희망마저 꺾인 채 좌절 속에서 기도원을 찾아 금식기도하며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무척 힘든 시기였지요. 그러던 중 어느 장애인 선교회에서 아내를 만났고 결혼하면서 다시 희망을 가져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힘겨운 제 인생에서 주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은 아내를 만나 결혼한 일입니다. 아내는 단순히 배우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 제 눈과 귀 대신 내려주신 생명의 동아줄 같은 사람입니다. 앞이 아무 것도 안보이고 외로운 길이었지만 한결같이 제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아내 덕분에 이 모든 난관을 헤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두 사람이 만난 것은 한 장애인 선교회를 통해서였다.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려운 조영찬 씨는 항상 점자책을 가지고 다니며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모습이 김순호 씨의 눈에 들어왔다. 선교회에서 다함께 연극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중에 순호 씨는 영찬 씨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고 마침 시장하던 영찬 씨는 평생 잊지 못할 맛있는 라면을 먹게 됐다고.
김순호 씨는 당시 조씨에 대해 기억하기를 “항상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이 마치 옛날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며 “결혼한지 24년이 되었는데도 남편은 변함없이 늘 책을 읽고 있다. 예전엔 점자책이었던 것이 지금은 점자단말기로 바뀐 것뿐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공부에 열중하다가도 저에게 다가와 손을 잡으며 저의 컨디션을 살피고 안마를 해주세요. 남편은 시각과 청각을 잃은 대신 남은 감각인 촉각, 후각, 미각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부단히 찾고 싶어합니다. 감각을 뛰어넘는 상상을 통해 제한된 욕구를 해소하려고 항상 노력해요. 남편은 가슴에 끊임없이 무언가에 대한 목마름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늘 고생하며 공부한 만큼 길이 열리지 않아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 또한 아려옵니다. 그 럼에도 한결같이 배움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열정을 품고 계속 공부하는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과 칭찬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박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조영찬 씨의 앞길은 여전히 캄캄하다. 한국에는 시청각장애인 신학박사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현실이다. 조씨는 이런 상황을 마치 “공연 준비는 죽도록 시켜놓고 준비가 다 갖춰지니 무대를 제공하지 않는 공연장 같다”고 말했다.
“시청각장애인에게 박사과정이란 깎아지른 암벽을 등반하는 것만큼이나 벅찬 여정입니다. 그 길이 너무 힘겨워서 도중에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힘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을 때의 기분은 한편 허탈하기도 했고 이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해방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학위를 받은 이후에 비장애인 신학박사들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거나 교회를 이끄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저는 그 어느 쪽도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현재는 다니던 학교와 교회를 나와서 휴식하며 삶의 여유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활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맞춤형 대안교회를 모색하면서 매주 지인들에게 온라인으로 문서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영찬 씨는 오늘의 교회에 대해 “낮은 자, 약자 중심의 복음을 잃어버린지 오래”라고 말했다. “낮은 자와 약자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교회 조직을 키우고 많은 교인을 불러들여 양적 성장을 도모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모습은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욕망의 발로”라고도 덧붙였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없으셨어요. 예수님은 이미 존재했던 유대교라는 종교 안에서 그 종교를 뛰어넘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서 낮고 약한 자들이 절망과 고통뿐인 삶 속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찾게 하시려고 십자가까지 지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교회는 교회의 덩치를 불리기 위해 약자와 낮은 자들과 함께 하려는 복음정신을 많이 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잃어버린 구원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즉 교회가 교회로서 본질을 회복해야만 교회도 살아나고 양들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기에 앞서 교회와 기독교가 먼저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회개하는 일이 예수님이 가장 간절히 바라시는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영찬 씨는 사람은 시각이나 청각이 없어도 살지만 희망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세상에 참 희망을 전하기를, 조영찬 씨의 앞날에도 비록 좁은 길이지만 한줄기 밝은 희망의 빛이 비추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한지은 기자
◀국내1호 시청각장애인 박사 조영찬 씨와 그의 눈과 귀가 되어준 아내 김순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