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목단상] 이태석(李泰錫) 목사 독립애국소년이 순교목사로(이승만 목사의 선친)

Google+ LinkedIn Katalk +

1919년 봄, 대한독립만세! 일본제국주의 탄압정치에 항거하여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인파의 대열속에 한 까까머리 청년이 끼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 청년은 당시 서울 경신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8세의 이태석 군이었다. 유년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했으며 서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년 3.1만세운동에 연루되어 고향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하여 태탄사립학교에서 농촌아동들의 훈도일을 맡아 교육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학구의 정열을 억제하지 못하는 젊은 학도 이태석 청년은 다시 평양으로 올라와 숭실학교에 편입학하여 수학하던 21세 되던 해에 다시 학생의열단(學生義烈團)을 조직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황해도 해주형무소에 수감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청운의 꿈을 안고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자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을 하면서 오사카 명교중학을 졸업한 후 도교 중앙대학 예과를 거쳐 갖은 어려움 끝에 상과를 졸업했다. 

이렇듯 나라찾기의 열정과 학업닦기의 노고를 통하여 신앙과 인격 그리고 지식을 몸에 지니게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 청년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시려고 생애의 방향전환을 시키셨다.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현재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당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 신학교 졸업반으로 성결교 전도사로서 충청남도 금산교회에 목회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1932년 32세에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해인 1933년 같은 고장 충남 강경읍의 강경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6년에는 전북지방으로 임지를 옮겨 군산교회를 부임하여 목회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등 그후 평양시내의 상수리교회에 부임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신암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하셨다. 여기서 그는 감격의 8.15를 맞았다. 그러다가 1950년 시내에 있는 산양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6.25가 발발하게 되었다. 

한편 이태석 목사는 일찍이 경신중학교 1학년 때 3.1운동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주도하기도 해서 일제의 감시를 받았으며 해방 이후에도 공산정권 불법적 처사에 끝까지 맞서서 항거하는 일을 계속해왔다. 1945년 조국의 해방과 1950년의 6.25동란 등 수많은 혼란과 위협의 와중에서도 여러 교회의 강단수호와 교인들의 양육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을 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국의 복음전파의 씨앗으로 썩는 밀알이 되게 하였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그림자처럼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순교의 숭고한 자리에까지 인도하셨다. 1950년 북한공산정치하의 탄압과 남한의 국군 및 유엔군의 공습폭격이 심했던 당시의 위험 가운데서도 교회에 모여드는 적은 무리의 교인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서라도 목양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다는 결사적 투지는 그의 굳게 다문 입술가에 나타나 보였다. 특히 사변직후 일방적 교회폐교 통고를 이태석목사는 끝내 거부하며 교회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중 6.25동란으로 교회지도자 목사님들과 성도들 그리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공산당원들에 의해 수없이 희생당하였다.<계속>

김종희 목사

• 경신 중ㆍ고 전 교목실장 

• 전 서울노회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