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 ‘향린원’ 선생님 ②
전염병 걸린 고아들 밤새 간호
마침내 병균 옮아 혼수상태
향린원 아이들 밤새워 기도
멈췄던 심장 되살아난 기적
다시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광은이 열여덟 살 되던 1940년에 그는 또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 당시의 상황을 형 태은 장로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 무렵의 어느 여름이었다. 무서운 전염병인 발진티푸스가 온 마을을 휩쓸었다. 드디어는 향린원에까지 전염되어 많은 고아들의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광은이는 침식을 잊어버리고 쓰러져 가는 고아들을 붙들고 통곡을 했다. 40℃의 고열로 사선을 방황하며 엄마를 찾는 불쌍한 고아들을 품에 안고 그는 밤을 새며 간호하였다. 지칠대로 지친 동생에게 마침내 병균이 옮아, 혼수상태로서 순화병원 격리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광은 위독 즉래’라는 전보를 받고 신의주역에서 밤차를 타고 상경해 보니, 그때는 이미 의사로부터 살 가망이 없다는 선고가 내린 뒤였다.
인간의 재능과 힘에는 한계가 있는 것, 이젠 하나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었다. 나는 철야 기도를 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향린원의 어린 원아들이 우리 선생님 살려 달라고 매일 저녁 삼각산 용바위 위에서 철야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형이 내자동에 위치한 순화병원에 갔을 때 광은은 계속 인사불성에 빠져 깨어날 줄을 몰랐다. 의사는 다음과 같이 진단 결과를 내렸다.
“24시간 안으로 심장 기능이 마비될 것입니다.”
형은 즉시 고향집에 전보를 쳤다.
‘모친 즉시 상경 바람.’
‘심장’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형이었다. 원래 아버님이 심장이 약하셔서 거의 폐인처럼 지내시는 데다, 광은 자신도 세 살 때 한번 죽었다 살아난 이후 계속 심장이 나빠서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심장 판막증으로 평상시에도 고생하던 동생의 죽음을 이제 눈앞에 맞이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형 태은 씨는 순화병원에서 인사불성에 빠진 동생과 같이 밤을 지새게 되었다. 침대에는 향린원 선생 한 분이 앉아 자기 무릎 위에 의식을 잃고 있는 광은을 안고 있었다.
그 광경에서 형은 우선 어떤 감동을 느꼈다.(친형제도 아닌데, 그리고 전염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간호할 수가 있을까!)
그 무렵에 향린원 아이들은 삼각산 용바위에 모여 황 선생님을 살려 달라고 밤새워 기도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기도하다 보니 어느 덧 훤히 날이 새고 있었다.
“가자!”
한 아이가 말했다. 여섯 명이 뒤를 따랐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가자”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들은 마음으로 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 일곱 명은 삼각산 용바위에서 향린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내자동에 있는 순화병원으로 달려갔다.
순화병원은 전염병원이어서 외래객의 방문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마를 만들고 교대로 서로가 도우며 담장을 타고 넘었다. 그들은 병실을 헤매며 광은 형을 찾다가 어느 병실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광은 형을 발견하게 되었다.
“형님!”
그들은 소리치며 의식을 잃은 광은에게 달려들었다. 광은 형이 아무 말도 할 리 없었다.
그들은 마루에 꿇어앉아 다시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기도 드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형은 어떤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린 것들의 기도를 꼭 이루어 주시리라.)
그들은 날이 새어 들키기 전에 가야 한다고 하며, 다시금 담장을 타고 넘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때 새벽 차로 서울에 도착한 어머니가 병실 안에 들어섰다. 어머니는 거의 다 죽은 아들 머리맡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번에 광은이를 살려 주시면 내 아들이라고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써주십시오.”
그날 아침 9시경에 다시 기적이 생겼다. 왕진 의사가 체크를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 것이다.
“이상하군요! 멈추어졌던 심장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뒤이어 광은은 ‘물’을 찾았다.
회복의 속도는 빨라 열흘 뒤에는 퇴원해도 좋다는 병원 측의 허락이 내리게 되었다.
광은 형이 퇴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향린원 원생 30여 명이 들것을 들고 순화병원에 나타났다.
“형님, 어서 여기 타시오.”
그들은 싫다고 하는 광은을 억지로 들것에 태웠다. 귀빈을 가마에 태우는 그런 감정의 발로였다.
“앞으로이 갓!”
한 어린이의 구령에 맞추어 그들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이어 그들의 입에서 찬송가가 나왔다.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그들은 개선가를 부르는 기분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발걸음도 당당하게 삼각산의 향린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서울 시내를 누비고 나서 삼각산 향린원에 이르니 거기에는 더 감동적인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향린원에 있던 원생들 전원이 뚝바위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광은 형님을 태운 들것이 나타나자 와르르 밀려 내려오며 소리질렀다.
“광은 형님 만세!”
“광은 형님 만세!”
조국광복을 전후한 시절
황광은 목사는 조국인 한국이 역사적으로 가장 불행했던 시대에 태어나 살다가 가신 분이다. 우선 일본의 식민지 치하였던 1923년에 출생해 어려운 소년 시대를 보냈고, 청년 때인 1945년에 조국은 광복되었으나 이어 남북으로 분단된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5년 후에는 한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거센 폭풍우를 맞게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못하여 온 겨레가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1970년에 이 세상을 떠나간 것이다.
황광은 목사와 같은 무렵에 태어나 오랜 세월 동안 교분을 맺으며 지냈고, 황광은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황 목사의 유고집을 내는 일에 힘쓴 아동 문학가 안성진(安城鎭) 목사는 황 목사의 10주기인 1980년에 미국 시애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같은 실향민으로서의 슬픔을 토로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