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한 점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한다. CCTV에 찍혀도, 블랙박스에 찍혀도, 몰래카메라에 찍혀도 한점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한다. 들키거나 잡혀도 한 점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한다.
다니엘은 나라 법이나 도덕적으로 한점 흠이 없었다. 그래서 왕보다 자기들 신을 더 섬긴다고 신앙적으로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 핍박이 따르고 고난의 길이 펼쳐진다.
종국에는 목숨을 내놓는 희생도 각오해야 한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하셨다.
필자가 어느 날 새벽에 다니엘서 6장 1절~9절까지 말씀을 교독했는데 유난히 6장 4절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흠 잡힐 데 없이 살았는데 오히려 고난과 핍박이 따른다. 먼저, 동방의 의인 욥은 재산이 다 날아가고 아들-딸이 다 죽고 아내는 저주하고 도망가고, 친구들은 네 하나님 뭐하냐며 빈정대고 본인은 온몸이 간지러워 사금팔이로 빡빡 긁었는데도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안에 있으니 기뻐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12제자는 거의 다 목숨을 내어놓는 희생을 당했다. 세 번째로 바울도 세상 사람들이 다 원하는 좋은 가문과 높은 지위와 많은 부를 배설물같이 다 버렸다고 했다.
예수님 믿는 것은 부와 권력을 누리며 세상에서 ‘으험’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게 아니라 고통과 핍박이 따른다는 걸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럼으로 더욱이 한 점 흠 잡힐 데가 없이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이미 다니엘 3장 18절에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씀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의 찬송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에게는 분별하는 지혜를 마련해 주시고, 흠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신다. 우리들의 생활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흠 잡힐데 없도록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졌다면 윤리 도적적으로 흡잡힐 데가 없어야 한다.
이상조 장로
<경서노회 은퇴장로회 전회장·선산읍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