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입원과 사랑의 고백 [2]

Google+ LinkedIn Katalk +

병원에 며칠간 휴직계를 낸 허영숙은 온갖 정성을 다해 춘원을 간호했다. 애인처럼, 누나처럼, 어머니처럼, 허영숙의 지극한 보살핌에 춘원의 몸상태는 많이 호전됐다. 춘원은 누나처럼 자신을 지극히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고 있는 조선의 허영숙을 그의 커다란 사슴 눈망울로 지긋이 바라볼 뿐이다.

이젠 허영숙이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애절한 보호감에 춘원은 스스로 안도하고 있는 걸까? 먹는 것, 입는 것은 물론 병원비며 모든 비용은 전적으로 지금 허영숙이 전액 부담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퇴원하면 춘원이 다시 돌아 갈 하숙집도 넓직한 더 좋은 집으로 바꿔 계약하고 왔다. 그야말로 춘원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지금 허영숙이 자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춘원이 퇴원하는 날이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 문턱으로 들어 가는 청명한 날. 하늘에는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이들 젊은 남녀를 반기고 있었다. 한동안 병원에 갇혀 있었던 춘원에게 오늘은 바람을 좀 쏘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허영숙은 대절한 택시를 타고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에펠탑으로 방향을 잡았다. 새로 계약한 춘원의 하숙집도 같은 방향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타워는 프랑스 에펠탑보다 9미터가 더 높은 탑으로 이 탑은 도쿄의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이 건물 옆에는 의외로 아담한 숲과 계곡이 있어, 여름에는 그 숲이 더욱 울창해서 연인들이 산책하기엔 안성맞춤인 곳이기도 하다.

춘원과 허영숙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숲과 계곡이 맞닿는 어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무성한 이름모를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여름 햇살이 삐끗 비쳐들고 있었다. 눈아래 계곡에는 우람차게 흘러가는 물소리가 여름날의 운치를 한껏 높여주고 있었다.

“춘원! 앞으로는 내 손을 꼭 잡아요. 놓치지 말고요. 내가 늘 당신곁에 있으면 안될까요?” 여인은 벌써 남자에게 성급한 청혼을 시도하고 있었다. 춘원은 말없이 그저 그 특유의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허영숙은 오늘은 끝내 결판을 내고 말겠다는 강한 표정을 지으며 단도직입으로 다시 말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춘원! 나와 결혼해 줘요.” 춘원은 계속 말이 없다.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고 있었다. 허영숙은 몸이 확 달아 올랐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해 주세요.” “……….” 그래도 춘원은 여전히 말이 없다. 허영숙의 자존심이 한계에 온 듯했다. 서로 말없는 침묵이 어느 정도 흘렀다. 드디어 춘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허 선생이 좋아요. 그런데.” “그런데 왜 그래요?” “나는 결격사유가 있는 남자예요. 말하자면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격이 없다니요? 무슨 뜻이지요?” 허영숙이 춘원을 무섭게 쏘아 보면서 물었다.

“나는 고향에 처자가 있는 몸이오. 중매로 결혼한. 아이까지 둘씩이나 있는 기혼자란 말이에요.” 춘원은 정말 말하기 힘든 말을 결국은 내뱉고는 먼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 허영숙의 얼굴빛이 일그러지며 한 동안 말이 없다.

“지금으로서는 허 선생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어서….” 춘원은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한 동안 말없이 침묵하던 허영숙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당신 말처럼 지금으로서는 그렇지만, 나중에는 자격이 생긴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춘원은 힘있게 답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허영숙의 음성에는 애원과 같은 간절함이 있었다. “당장 귀국해서 이혼하겠소. 그런 후, 당신과 결혼하겠소.” 허영숙의 얼굴에 희망의 잔잔한 미소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춘원, 그 말을 내가 믿어도 되겠어요?” “분명히 약속만은 할 수 있어요. 내 그리 하겠소. 당신이 좋다면.”

허영숙은 환한 미소를 그 남자에게 보이는 것으로, 마음의 허락에 대한 답을 보내고 있었다. 허영숙은 앉은 자세를 갑자기 바꾸면서 춘원의 목덜미를 자신의 가슴속으로 끌어당기며 힘껏 껴안았다. “춘원! 내가 당신을 몹시 사랑하고 있는 거 알아요? 당신은?” “……….”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