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자식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16) 이것은 신명기에 명기된 ‘연좌제 금지법’이다. 연좌제(collective punishment)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뿌리 깊게 내려오는 형사 처벌 제도이다. 죄인에 대한 형벌을 가족, 친지까지 확대해서 처벌하는 제도이다. 고대 사회에서 흔히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특히 왕조 시대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대역죄의 경우 대부분 연좌제로 처벌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대역죄는 ‘3족’을 멸했고, 부모 형제 자식 사촌 육촌, 심한 경우에는 사돈의 팔촌까지 처벌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연좌제는 8.15해방 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형사 책임의 개별화 원칙에 따라 1980년 개정 헌법에서 연좌제를 금지했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헌법 13조 3항) 수천 년 전의 기록인 신명기에 이미 연좌제 금지법이 명기되어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이는 신명기가 모든 개인의 인권을 얼마나 존중하느냐 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연좌제 금지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할 때, 놉(지명)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도피하는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죄명으로, 사울 왕은 놉의 제사장 85명을 전부 죽이고, 놉에 살고 있던 제사장들 가족들, 어린아이, 젖먹이까지, 심지어 그곳에 있던 가축들까지 모두 몰살시켰다. 놉의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은 연좌제에 희생된 것이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들이 많았다. 왕위를 찬탈하고 왕좌에 앉은 이들은, 폐위시킨 왕가에 속한 왕족들과 귀족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예를 들면, 바아사 왕(왕상 15:23), ‘7일천하’의 시므리 왕(왕상 16:11~12), 피비린내 나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예후(왕하 10장) 등이다. 그들의 잔학한 행위도 일종의 연좌제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에 명기된 연좌제 금지법을 지킨 왕도 있었다. 남유다 왕국의 10대왕 아마샤였다. 그의 선왕이 되는 요아스는 측근 신하들에 의해 시해당했다.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밀로 궁에서 그(=요아스 왕)를 죽였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 12:20~21) 혼란된 상황이 안정되자 아마샤 왕은 부왕 요아스를 시해한 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아마샤는 왕을 시해한 자들의 자녀는 죽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열왕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마샤 왕이) 왕(=요아스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거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왕하 14:5~6) 신명기의 연좌제 금지법을 지켰던 아마샤 왕의 최후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부왕 요아스 왕과 같이 그도 반역을 일으킨 무리들에 의해 시살당하고 말았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