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정몽주 성삼문 시조사상과 애국가정신

Google+ LinkedIn Katalk +

고려말 충신 선비 포은 정몽주(1337-1392)가 남긴 단심가, 조선조 으뜸 사육신 성삼문(1418-1456)이 남긴 충의가의 시조사상에 감명 받으며 포은 매죽헌 두 신의 있는 순국 선비를 나는 존경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의 고려 나라 사랑피가 지금도 그가 이방원(조선조 태종)의 신복 조영규에게 칼 맞은 곳 개성 선죽교 다리 위를 흐르고 있다. 이방원의 하여가의 화답시조로 알려진 단심가는 고려말 당시 공양왕에게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없다는 신의와 지조를 보여준다. 백번 고쳐 죽더라도 임향한 정몽주의 불타는 일편단심 애국심을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 3절에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로 담았다.

한가위 밝은 달의 일편단심이 우리 짚신겨레 애국사상으로 도산은 나타낸 것이다. 시적으로도 밝은 이미지가 잘 승화되어 있다. 조선조 으뜸 사육신 성삼문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이 어린 왕자 단종을 잘 지켜달라는 고명顧命을 죽음으로 지켰다. 세조 제거의 혁명을 도모하다가 김질의 배신으로 사육신은 세조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세조는 벌겋게 달구어진 쇠꼬챙이로 성삼문에게 왜 나를 배신했느냐고 심문하자 성삼문은 “하늘에 해도 하나요 달도 하나요 내 가슴에 임도 하나이기 때문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가슴 임이 누구냐?” 세조가 묻자 “상왕 단종이다”라고 말하고 세조는 왕자로 대감 곧 나으리지 결코 상감이 아니라는 것이 성삼문의 충군사상이었다. 성삼문이 남긴 충의가 시조에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백설이 만 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로 중장 종장에 읊어 지조 있는 성삼문의 애국사상을 잘 드러낸 것이다. 성삼문의 독야청청 지조와 단종을 향한 신의와 피끓는 애국심은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 2절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노래 가사에 깊이 새겨 담았다.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애국지하단체인 신민회 조직차 귀국해 1907년 3월 봄에 평양에서 이틀 금식기도하고 지은 노래 가사가 바로 사계절을 배경으로 지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오늘의 우리 애국가인 것이다.

1955년부터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시작된 이래 지금 안창호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로 대결이 되어있다. 신빙성 없는 증거가 많다해 애국가 작사자는 아니다. 정몽주, 성삼문처럼 신의 있는 선비로 나라에 목숨을 바친 지조 있는 애국자가 애국가 작사자라 할 수 있다. 중도에 친일로 변절해 민족에게 어록 한마디 남김없이 내선일체 친일 행위에 앞장서서 일제 칙선의원까지 지낸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결코 될 수 없다. 시조사상을 연구해 온 나로서는 포은 정몽주 매죽헌 성삼문이 남긴 단심가, 충의가의 애국애족사상이 애국가사상으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겸손해 공을 남에게 돌리는 안창호는 60한평생 일관된 지조로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독립투쟁만 하다가 옥고 치른 후유증으로 순국한 것이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유다나 매국노 이완용 같은 배신자는 지은 죄를 씻을 길이 없다. 선비는 신의 있게 살아가야 한다. 독야청청 지조로 한가위 달처럼 일편단심 밝게 밝게 살아가야 한다. 정몽주는 어머니 시조에서 해오라기로서 까마귀 싸우는 골에 가지 말라 경고 했으나 이방원 야심자의 초대에 갔다가 죽음을 당했다. 세조는 성삼문은 내 앞에서는 역적이지만 훗날 충신 소리를 들을 것이라 말했다. 숙종때 충신으로 명예회복이 되었다. 정몽주의 일편단심, 성삼문의 독야청청을 거울 삼아 우리도 신의 있는 선비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나무 겨레기상과 가을하늘의 밝은 달같은 마음으로 우리 애국가를 4절까지 꼭 다 불러 나라를 사랑해야겠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