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가 1918년 11월이었다. 마음이 바빴다. 춘원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곧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머뭇거리지 않고 ‘조선청년독립단’에 입단하고 조직 재정비를 서둘렀다. 두 사람은 다음 날, 다시 일본으로 바로 건너가야만 했다. 도쿄에 돌아가자마자 춘원은 상하이와 도쿄에 있는 유학생, 독입운동가들과 협의하며 2.8독립운동선언문 작성에 착수했다.
2.8독립선언문 초안은 춘원이 맡았다. 영문(英文)까지도 준비해서 완성된 독립선언문을 도쿄 주재 미대사관, 각국 영사관, 각 언론사에 일제히 배포했다. 그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내 경성에 있는 모든 독립단체는 물론 해외 미주 등 모든 전역에 이 선언문을 발송했다.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은 경성은 물론 만주에서도 발표되었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 운동은 본래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장례일인 3월 3일로 거사 날짜가 잡혀 있었는데, 일본 고등계 형사로 있던 조선인 신철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찍어내던 인쇄소를 급습한 사건으로 거사일을 3월 1일로 당긴 것이다.
3.1운동의 단초를 만들어 낸 2.8독립선언이 선포되자, 도쿄 시내가 하루 아침에 발칵 뒤집혔다. 드디어 경찰이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춘원에 대한 체포망이 점점 조여오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 주변 동료들이 일제히 춘원이 매우 위험하니 당분간 이곳을 피신하는 것이 좋겠다고 모두들 충고했다.
특히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지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등은 진심어린 충고로 이곳을 오늘밤 내로 빨리 떠나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결국 춘원은 이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오늘밤 떠나기 전에 꼭 만나 보고 가야 할 여성이 있어 춘원은 좀 난감했다.
그 여성은 바로 나혜석(羅蕙錫)이었다. 도쿄 여자전문학교 유화과 졸업생 나혜석과 밥먹기로 약속한 날이 바로 오늘밤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어렵게 이뤄진 약속인데 싱겁게 바람을 맞칠 수는 없었다. 춘원은 그녀와 약속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간에 맞춰, 춘원은 긴자 맛집, 제일 초밥집에 도착했다. 밥집에 들어서니 안쪽 한 켠에 나혜석이 안경을 쓴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나혜석은 춘원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사랑을 고백한 최초의 여인이다. 그러면서 나혜석은 춘원에게는 슬픈 추억을 깊이 심어준 여인이기도 하다. 춘원이 인촌 김성수 후원으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동경 유학생의 환영 파티 자리에서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던 신여성이 바로 나혜석이다.
그때부터 춘원은 나혜석을 부지런히 따라 다녔다. 성격이 쾌활하고 개방적이었던 나혜석은 그러는 춘원을 멀리하지 않고 잘 대해 줬다.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 나혜석도 춘원을 무척 따랐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사단이 일어났다.
그날도 나혜석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골목에서 건장한 웬 낯선 사나이가 불쑥 나타나서, 춘원이 다시는 나혜석을 만날 수 없게 무서운 겁박을 주고 갔다. 그 사나이는 나혜석의 둘째 오빠, 나경석이었다. 도쿄 유학생간에 소문난 건달 깡패였다. 춘원이 기혼자며,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노발대발 했다.
그 약점으로 춘원을 꼼짝 못하게 했다. 한번 제대로 걸리면, 뼈도 못추리게 한다는 억센 사나이의 협박이 그날밤, 춘원을 너무나 무섭게 했다. 심약한 춘원으로서는 다시는 절대 안만나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겨우 풀려난, 지난날의 아픈 추억이 춘원에게 있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