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교과서에 실린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가 생각나 인터넷을 뒤져 글을 찾아 읽어본다.
“벚나무 아래에…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낙엽타는 냄새를, 그 포근한 향기를 즐겼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화재를 염려해서 지금은 낙엽을 함부로 태우지 못하게 되었지만 예전에 골목길을 돌아가다 어느 집에서 마른 잎을 긁어모아 태우는 냄새가 연기와 더불어 다가오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이를 즐겼다. 나는 스스로 냄새에 민감하다고 자부하는데 孝石도 그런 편이셨는지 그 수필 중에 이런 대목도 있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고보니 낙엽 타는 냄새와 커피향이 고상한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백화점 1층에 들어섰을 때 여러 화장품 매대로부터 경쟁적으로 풍겨 나오는 향수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향기이다. 낙엽에는 봄에서 가을에 이르도록 피고지는 꽃들과 대비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말하자면 샤넬 향수와 스타벅스 커피향의 차이 같은 것이다. 나뭇잎에 따라서는 곱게 단풍이 들어 보는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도 있지만 떨어져 누워 수북이 길을 덮고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면서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마운 역할이 있다.
제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채 떨어져 나무아래 쌓인 단풍잎을 보라. 한 개를 집어 들고 완벽하게 다섯 또는 일곱의 홀수 가지로 갈라진 구도를 들여다보면 어느 예쁜 꽃만 못할 바가 아니다. 남산의 비탈길이나 시내 인도를 덮고 있는 은행잎들은 또 어떤가. 어찌해서 얘들은 이토록 겸손한 부채꼴이 되고 차분한 노랑색을 띄워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쓰다듬고 있나. 각자 처지에 따라 어떤 이들은 낙엽을 밟으며 우수에 잠기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거리의 낙엽은 우리를 조용한 정감에 안기게 하고 인생에 대한 자족과 감사로 이끈다. 그 넓적한 플라타너스 낙엽조차도 어쩌다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채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버려두기가 아까워진다.
언젠가 얕은 산을 내려오다 낙엽에 미끄러져 발을 살짝 삔 적이 있었지만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순간 푹신한 낙엽의 감촉이 좋게 느껴졌던 것만 같다. 사람이 간사한 동물이어서인지 봄과 여름 내내 온갖 꽃들을 예찬하더니 가을이 되니 낙엽타령이 좀 과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지나간 계절의 푸르름에서 누우런 낙엽으로 사랑이 옮겨오는 것을 부부관계에 비춰 본다면 마냥 나무랄 일도 아니다.
효석은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한다”고 수필을 끝맺는데, 자연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哲理를 거듭거듭 깨닫고 살아가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봄에 맨 먼저 꽃피었던 산수유나무의 마른 잎 속에서 영근 바알간 열매도 예쁘다.
김명식 장로
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