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호는 1884년 5월 12일 제주 한림읍 귀덕리에서 태어났다. 조봉호는 당시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에 유학해 신앙을 갖고 애국애족 정신에 눈을 뜨면서 3.1운동 이후 독립군 자금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1904년 3학년 때 부친이 사망하자 당시 19세인 조봉호는 고향 제주 최초의 신앙공동체인 금성교회를 개척하고 영흥학교를 세워 후배를 키웠다. 조운길, 이도종, 김진실, 양석봉, 이효민, 좌장수, 이의종 등 8인이 1907년 3월 10일 주일 금성리 하동(534번지) 양석봉 씨의 사택에서 첫 번째 예배를 드렸으며, 2007년 3월 10일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하던 중 쓰러져 있는 것을 금성교회 여성도가 발견하고 원기를 회복시켰다고 한다. 조봉호는 이기풍 목사를 도와 성내교회 조사로 활동하면서 민족 정신에 관심을 가지고 애국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기풍 목사의 권유로 조봉호와 이도종은 평양에서 신학 공부를 했고 이도종 목사는 4.3사건으로 순교했다.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서고 군대 양성을 위한 재정 마련을 위해 한 사람 당 2원씩 모금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 약 50일 동안 4,450여 인의 모금을 통해 1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했는데 그 중엔 조봉호 조사의 재산인 80필지에 이르는 밭과 집을 모두 처분한 기금도 포함돼 있었다. 조봉호 조사는 또 다른 토지를 매매해 그 돈을 독립군 자금으로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일경에 발각돼 그때 60여 명이 검거되고 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고초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한 것처럼 동지들과 말을 맞추고 혼자 십자가를 졌다. 투옥되고 1년 뒤 광주형무소에서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으로 1920년 4월 28일 3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는 개교 130주년을 맞아 연세대학교 대강당에 기념식을 하는 자리에서 조봉호 지사에게 명예졸업장과 자랑스러운 경신인상을 그의 손자 조재석 집사에게 수여했다.
김종희 목사
경신 중ㆍ고 전 교목실장
전 서울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