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으로 훈련받던 무렵 ③
‘한국기독교시선’ 양장 발간
뚫린 바지 입고 웅변대회서 수상
고아들 돌보며 ‘삼동사업’ 전개
난지도에 ‘삼동 소년촌’ 건설
1968년 7월, 대한기독교교육협회(총무 한영선)에 간사로 일하던 황 목사는 뜻밖에도 ‘한국 기독교 시선’을 초호화 양장으로 발간해냈다. 이는 당시 기독교서회에서도 엄두를 못내던 때였다. 김경수,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 박화목, 석용원, 이상노, 임인수, 정기환, 황금찬의 작품 80편과 김경수, 석용원의 명상시가 한데 엮어진 사화집(詞華集)이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현대시라는 것이 딱딱하기 그지없고, 신앙시라기보다는 반신앙적 요소가 더 많은 터였다.
“시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시없는 성서를 생각할 수도 없거니와 시없는 신앙생활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머리말 첫머리의 말이다. “종교는 시요, 시는 종교로 가는 길 안의 길이다”고 한 프레드릭 로버트슨의 어마어마한 말까지 인용해 놓았었다. 이게 다 황광은의 이상이요 믿음이었다.
‘삼동’ 사업
한국신학대학 재학 시절에 황광은은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서 여러 번 특상을 차지했다. 한번은 특상을 타게 되어 학장인 송창근(宋昌根)) 박사 앞에 나갔다. 송 박사는 상을 줄 생각은 않고 빙그레 웃더니, “황광은, 어디 한번 뒤로 돌아서 봐”라고 했다. 황광은은 궁둥이가 뚫어진 바지를 입은 채 웅변대회에 나가 열변을 토해서 특상을 차지한 것이다.
전교생이 한바탕 웃는 가운데 송 학장은 입에다 붓을 물고서 상품인 성경책에다 서명해서 수여했다. 광은은 그 성경책을 아주 귀중하게 간수했는데, 6.25동란 통에 잃어버리고 나서 이따금씩 아쉬워하곤 했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남기며 광은이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것이 1948년이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는 길로 그는 중앙 YMCA 소년부 연습 간사가 되었다. 그는 열심히 자기 임무를 다했다. 그의 성실성은 곧 그 당시 YMCA 총무였던 현동완(玄東完) 씨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로부터 현 총무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소년부 간사로서의 황광은은 또 계속 고아들과 접촉을 가졌고 그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 광은의 사랑을 받은 고아로서 김영봉이 있다. 어쨌든 현 총무의 이해와 후원으로 광은은 YMCA 지하실에다 길거리에 유랑하는 소녀 20여 명을 모으고는 밤마다 공부를 가르쳤고, 그들의 형 노릇을 하며 생활지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구두닦이 통을 만들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낮에는 구두를 닦아 생계를 위해 일하게 했다. 지금은 가는 곳마다 구두닦이가 많이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 구두닦이라는 것이 광은이 생각해 내어 적극 추진한 일이다.
광은이 하는 일을 가리켜 어느 사이에 ‘삼동(三同) 사업’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원래가 변소였던 자리를 개조해 고아들과 함께 지내는 터이라, 여름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냄새가 났고 겨울에는 또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웠다.
그러나 광은은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도 고아들과 함께 거기서 잤고, 냄새나는 여름에도 그들과 함께 보기만 해도 불결한 음식을 함께 먹었다.
그런데 황광은 간사가 하는 일에 조그만 말썽이 생기게 되었다. 종로 네거리에서 거지들을 모아 살게 했으니 거기 드나드는 점잖은 분(?)들 눈에 거슬리지 않을 리 없었다. 거기에다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니 동료 간사들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해 현 총무에게 광은을 헐뜯는 말을 했다. 심지어는 광은이 양아치들과 함께 더러운 곳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야심에서 비롯된 위선이라고까지 모함했다.
그러나 현 총무는 광은의 뜻을 잘 이해했다. 우선 광은의 성실한 면이 마음에 들기도 했으려니와 자기의 뜻을 따라 그 누구보다도 채식주의를 철저히 따랐고 기도생활에 호응하는 면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현 총무는 광은에 대한 모함이 있을 때마다, “황광은은 한국의 성자가 될 수 있는 젊은이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광은은 몇몇 사람한테 더 시샘을 받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황광은을 위해 현 총무는 터전을 하나 마련해 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결과 한강 한복판에 위치한 난지도(蘭芝島)를 기증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 총무는 정일형 박사와 당시 성서신학교를 운영하던 홍종관 목사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해 난지도 100만 평 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현 총무는 곧 광은의 책임 아래 난지도에다 ‘삼동 소년촌’을 건설하게 했다. 그것이 1949년의 일이다.
난지도에서 고아들은 수수, 콩, 감자, 토마토 등을 농사짓기도 하고, 또 닭도 기르며 자족자급하는 생활을 익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찾아와서 함께 자고 가는 형 광은을 기다리며, 평화스러우면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강산에 뜻하지 않게 전란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오게 되었다. 이 나라 겨레치고 어느 누가 6.25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리오만, 광은 역시 고아들과 함께 서울에 남아있다가 큰 고생을 치렀다. 6.25사변 당시의 이야기를 그는 자신이 직접 다음과 같이 한 바 있다. (황광은 설교집 ‘성직자’ 중에서)
저도 6.25사변 때에 고아들 30명을 데리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이런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YMCA 지하실에서 밤마다 공부를 시키던 거리의 소년들과 운명을 같이 하려고 서울에 남아 있었지만, 당장 먹을 것이 곤란해졌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수박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하도 깎아주질 않길래, 옆에서 ‘그냥 밑져서라도 팔아 버리라’고 했더니, 저녁에 계산을 해보니까 정말 밑졌다는 것입니다. 다음날부터는 나는 그나마 실직을 하게 되었고, 폭격에 쫓겨 이리저리로 자리를 옮겨 다니게 되었습니다.
용산에 있던 형님 집이 화재와 폭격으로 비었기 때문에 우리네 30명 식구는 거기를 거점으로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정말 ‘호구지책(糊口之策)’이 무엇인가 했더니, 낮에는 수박 장사로 번 돈을 가지고 밀기울을 사 오면, 저녁엔 그것을 맷돌에 갈아 죽을 쑤어서 나누어 먹는 어린 것들을 볼 때, 바로 이것이 ‘호구지책’이로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이렇게 지내면서도 주일에는 강단(창동교회)을 지키고, 밤에는 인민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찬송을 소리내어 부르지 못하고 가사만 돌려 읽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동안에도 인민군은 동네의 유지들을 어느 사이에 조사해서 사형 명단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그 후에야 알았습니다.
김희보 목사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