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면 1984년이 내가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다. 오 학장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내 이기심을 좇아 학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해 7월 30일 한국을 떠나 댈러스에 도착했다. 그 뒤로 1년 동안 하워드패인 대학보다 교회 일이 더 많았던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나는 연가를 얻어 하워드패인 대학으로 오기 전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애들 영주권을 수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해 5월에 갑자기 서울대에 다니는 큰아들이 애인을 집으로 데려왔다. 자기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결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K대 식영과에 다니는 졸업반 여학생이었다.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대학도 뒤숭숭하고 아내도 3월에 미국에 두고 온 자녀 때문에 도미해 집에 없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불신자였다. 내 생일이 5월 중순이었는데 그때 생일을 축하한다고 케이크도 사들고 왔다. 큰애는 앞으로 영주권을 받아도 대학원도 진학해야 하고 생활 능력도 없는데 내가 부양할 수도 없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어머니도 없는데 결혼은 당치도 않다”라고 말했다. 여자 친구는 교회에 나가 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는 일이 먼저다. 큰아들이 미국에 가서 대학원을 가게 되면 그때 시간을 두고 고려해 보자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자 친구더러 학생 비자를 받고 미국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시간을 두고 결혼을 생각해 보면 어떻냐고 말해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약속을 그렇게 서로 믿지 못하겠으면 약혼이라도 해두면 어떻겠냐는 말도 했다. 드디어 6월 17일에는 그 애 부모님이 찾아왔다. 호텔에서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오후 4시에 직접 집으로 왔다. 상대방 어머니는 수줍어하고 별말이 없는 분이었다. 한 시간여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나는 시내에 나갔고 큰애는 그분들을 배웅하기 위해 같이 나갔었다. 그는 저녁을 먹고 8시쯤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여자 친구의 어머니는 좀 결정적인 시원한 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 불만이었다고 말했으며 아버지는 “남자 측에서는 아들의 결정을 믿으며 그 뜻을 따르겠다는데 그보다 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음 주일 아침 식사하면서 큰애를 앞에 두고 한 어머니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좋은 가정을 원했는데 평범한 가정이요, 아주 예쁜 여성을 원했는데 보통 여성이요, 키가 큰 여성을 원했는데, 그렇지 않은 여성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맞아들이기로 했으니 좋은 신앙 가진 딸이 되게 하시며 그 가정도 구원받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큰애는 그때 아주 못마땅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서울대에 입학한 손자라고 벽에 입학통지서를 붙여놓고 늘 자랑스러워했던 할머니의 꿈은 최상의 손자며느리를 원했을 것이다. 큰애도 할머니를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내 아들도 마음대로 못했는데 어찌 손자며느리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큰애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미국의 각 대학원에 원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TOEFL이나 GRE 시험도 본 뒤 계속 미국 대학원에 원서를 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연가로 미국으로 떠난 뒤 두 아들은 한국의 미대사관에서 1995년 2월 말에 비자 인터뷰를 마치고 3월 17일 영주권자로 미국에 입국해서 나는 잠깐 그들과 같이 있었다. 내가 8월 초 귀국한 뒤 큰애는 아르바이트하고 있다가 보스턴 대학(BU)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소식이 와서 8월 보스턴으로 떠난 모양이었다. 그때 대학에 온 그해의 RA(Research Assistant) 중에서 선발시험(Entrance Exam.)에 그가 1위를 했다고 한다. 그는 연말까지 장학금을 절약해서 12월 겨울 방학 때 귀국해 여자 친구와 12월 27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다시 돌아갔다. 어머니가 그렇게 걱정했던 며느리는 지금은 세 며느리 중 가장 발랄하고 큰며느리로 지도력을 발휘하며 시부모에게도 가장 싹싹하다. 우리는 지금도 부모로서 그들을 짝지어주는데 한 일이 없다.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