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으로 훈련받던 무렵 ④
그 고아들이 내 생명 건져준 것
전쟁으로 남하해 제주까지 후퇴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과 만남
난지도 고아들과 움막집서 기거
(황광은 설교집 ‘성직자’ 중. 전 호에 이어서)
하루는 내무서에서 불러 들어갔더니 취조를 하는데 다짜고짜로 “애국자를 몇 명이나 고발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애국자’란 공산주의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젊은 혈기로 그런 고약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대들었더니 “이놈 봐라. 서늘한 맛을 한번 봐야 알겠니?”하고 협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정말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이미 내가 신학을 졸업한 것과 교회의 강단을 맡고 있는 것과 YMCA에서 일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내무서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우리 집 그 동네의 인민위원장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서울이 점령되기 직전까지 달구지를 끌던 사람인데 공산 천하가 되니까 동 인민위원장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무서워했고, 청소와 방공에 대해서 호령을 내릴 때마다 아니꼽지만 마당을 쓰는 척했고 불을 가리는 척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내무서원을 보고 “야야!”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저건 무엇하러 끌어 왔어”하고는 “저건 고아밖에 모르는 건데 내보내!”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겠습니까? 이건 또 내무서원이란 견장을 찬 작자가 쩔쩔매며 “네, 네”하고는 얼마 후에 나를 나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오는 길로 30명의 고아를 데리고 아예 도심지인 남대문의 창동교회 지하실로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저거 고아밖에 모르는 것인데.’ 이 한 마디가 나를 살려준 것입니다.
고아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나는 모릅니다. 열아홉 살부터 고아들의 불행한 설움을 덜어주려고 생각하고 또 노력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고아들을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는데 그 고아들이 내 생명을 건져준 것입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한국보육원의 교육부장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졌으나 그대로 서울에 있다가 죽을뻔한 황광은은 다음해 1월에 미군과 국군이 수복했던 서울에서 후퇴하자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남하했다. 그는 한반도의 가장 남쪽 지역인 제주도까지 후퇴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黃溫順) 여사를 만나 고아들을 돌보며 교육부장 직책을 맡게 되었다. 또한 훗날 결혼하게 되는 김유선(金裕善)을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인 1992년에 황온순 여사는 황광은 목사의 미망인 김유선 여사에게 다음과 같은 신년 축하 편지를 보내어, 한국보육원 시절을 그리워했다.
경애하는 유선 선생님, 신년이 찾아옵니다. 넘치는 희망의 기쁨을 찾아 가지세요.
몇 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서로 못 찾은 서러움 속에서 그래도 앞날을 내다보면서 어디에서라도 만나겠지 하고 막연히 기다리다 멀리 남의 나라 시카고에서 만날 것을 누가 뜻하였으리이까. 너무 반가워서 말이 안 나왔지요. 하나님의 보호로 우리가 살면서 행여나 만남을 기다린 지 벌써 수십년이 지나서야 만났으니 그 기쁨 어찌 측량하리오.
공경하며 아끼던 황 목사가 저술한 귀한 책들을 아낌없이 나에게 주셔서, 먼저 소포로 보내고 1991년 9월 27일 서울에 도착했는데, 그 귀한 책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반가운 중에 놀랐나이다.
우리가 제주에서 고생살이에서 같이 울고 웃으며 지내다가 아끼고 사랑하던 한국보육원을 떠났고, 그 후에 의지하고 통하던 황 목사님을 사별한 후 슬픔도 마르기 전에 헤어져서 서로 바쁜 시간에 쫓기면서 만나지 못했으며, 간 곳을 모르고 행여 행여 어디서 만나겠지 하면서 세월이 많이 흘러가서 한숨짓고 잊은 것이 또한 수십 년이 되었는데, 뜻밖의 남의 나라 시카고에서 만난 것은 꿈 가운데 꿈이었지요. 만난 기쁨에 좋은 음식 먹으면서 또한 목이 메었나이다. 다행 다행 살아서 만났으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지요.
나는 귀국한 지 몇 날 후부터 독감에 걸려서 달포를 일도 못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91년이 몇 날 안 남아서 급한 마음으로 앉아서 황 목사님의 귀한 책들을 감명깊게 몇 장씩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귀한 책을 나도 읽으며 고마워하면서 장자(長子)들 몇 명에게 이야기하니, 빨리 읽고 보내달라고 해서 그런다고 했어요.
몇십 년은 어떻게 지냈는지? 유선 선생 몇 시간 만난 그 기쁨이 계속 또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 서로 한국에서 만났으면 하는 욕심이 나는구려. 부디 영육 건전하고 직접 직장이 잘 확장되기를 빌면서, 온 가족이 평안하시기를 주님께 삼가 비나이다. 사랑, 온순 씀.
소년의 거리
이 땅에 다시 한번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갔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시작해 서울을 내어주게 되었다. 이른바 ‘1‧4후퇴’이다.
황광은도 난지도에 있던 고아들과 함께 밀리고 밀려서 제주도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막상 제주도에 내려가기는 했으나 당장 있을 곳이 없었다.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한라산 밑에 자리한 제주농업중고등학교 교사에 한국보육원이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더욱이 그 한국보육원의 원장이 황온순(黃溫順) 여사이니 한번 가서 말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한국보육원은 6‧25 동란으로 갑자기 집과 부모를 잃고 서울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이 주축으로 되어 있었다. 이른바 9‧28 수복 이후에 미군이 종로 초등학교에 그 고아들을 수용했다가, 1‧4후퇴 때에 근 800여 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헤스 대령의 비행기로 제주도까지 실어 날라 세운 고아원이었다. 헤스 대령의 그 고아 공수 작전은 유명해 미국에서 영화화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전송가(戰頌歌)’란 제목으로 상연되었던 적이 있다.
황광은은 황온순 원장을 찾아가 자기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했다. 황온순 여사는 황광은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처음이었으나, 그 첫 대면에 아주 쓸모 있는 청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즉석에서 교육부장을 맡아 모든 프로그램을 관리해 달라고 했다.
황광은은 난지도에서 함께 내려간 20여 명의 고아들을 위해 한국보육원 옆에 움막집을 지었다. 그 움막집에서 그들은 기거하며 낮에는 한국보육원에서 딸린 농장에서 일했다. 그들을 가리켜 “장형”이라고 불렀다.
김희보 목사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